1968년 8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소련·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동독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막을 내렸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스탈린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기존 질서를 지켜온 것은 '공산주의 콘크리트'로 불린 안토닌 노보트니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정체된 현실과 스탈린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불만은 사회는 물론 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점점 커지는 저항으로 번져나갔다. 이들은 국가 개혁과 더 넓은 시민적 자유를 원했다. 정치 체제나 동맹 관계의 변경이 제안된 것은 아니었다. 당 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세력은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지만, 개혁파는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개혁파는 경제의 제한적인 시장화와 기업의 독립성을 전제로 한 경제 개혁도 주장했다.
썩어가는 타협
당 서기장으로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선출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강경파와 개혁파 사이의 타협 인물이었다. 새 서기장은 평생의 절반을 소련과 함께 보냈고 모스크바의 당학교를 졸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브체크는 빠르게 프라하의 봄의 상징이 되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당 서기장은 사회 전반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개혁의 선언문 역할을 한 것은 언론인이자 작가인 루드비크 바쿨리크의 「이천 낱말」이었다. 이 문서는 막대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바쿨리크는 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하며, 민주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변화 노력을 공산주의자들이 비(非)공산주의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갚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변화 운동은 오직 공산당 내부에서만 시작될 수 있었다.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유일한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데르 두브체크는 당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강경파와 개혁파 사이의 타협 인물로 여겨졌다.
두브체크 같은 온건파가 주도권을 쥔 공산당은 루드비크 스보보다 신임 대통령과 함께 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권력 기관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이 담겼다. 당은 국가를 이끌되 경제·사회 생활을 직접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의회가 실질적인 입법 기능을 회복한다고 선언했으며, 연방 국가 체제를 통해 슬로바키아인들이 민족적 열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개혁은 시민 사회의 각성,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폭발적인 활동, 언론과 문화의 꽃피움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의 '연대' 카니발에 견줄 만한 풍경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에게 그 몇 달은 자유와 희망의 시간, 한 세대가 공유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고무우카의 강경 반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 특히 당내 개혁파는 온건한 개혁이 소련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바랐다. 실제로 소련 지도부는 초기에는 특히 군사적 개입에 대해 크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군사 행동을 압박한 것은 폴란드와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들이었다. 1956년 목숨을 걸고 소련에 맞섰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이제 폴란드로 번질 '체코슬로바키아 역병'을 두려워했다. 공산주의 정통성에 이끌린 발터 울브리히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도 마지못해 이 동맹에 합류했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이탈했다.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4천 대가 넘는 전차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진입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인민민주진영의 우방 지도자들은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이 독트린은 진영 내 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진영 전체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를 구속하고 개혁 철회를 강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었다. 사회의 변화는 이미 너무 멀리 나아갔던 것이다. 군사 개입이 필요했고, 소련 전차의 엄호 아래 충성스러운 동지들이 '정상화'를 도입해야 했다.
'다뉴브 작전'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린 군사 침공은 1968년 8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소련,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의 군사력에 의해 감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는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4천 대가 넘는 전차가 진입했다. 폴란드 파병 부대는 병력 2만 6천 명과 전차 600대로 구성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루드비크 스보보다 대통령은 군대에 막사에 머물 것을 명령했다.
동독식 '정상화'
침공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는 침공에 항의했다. 이는 국가 간 관계의 기본 원칙과 국제법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은 진격하는 외국군에 저항하지 말 것을 당부받았다. 소련군은 두브체크와 다른 당 지도자들을 억류해 모스크바로 압송했고, 침공을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특히 프라하를 중심으로 아래로부터의 소극적 저항과 자발적 시위가 조직되었다. 개입 다음 날에는 1시간 총파업이 벌어졌다. 사회의 저항은 희생자를 낳았다. 개입에 참여한 군대로 인해 총 90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은 프라하에서였다.

저항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고, 개입군에 의해 주로 프라하에서 90명이 목숨을 잃었다.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체코슬로바키아 측은 협박과 위협에 못 이겨 양보를 강요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4차 당대회 무효화, 언론 검열 복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문제' 철회에 동의했다. 체결된 협정은 또한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다.
1969년 4월, 두브체크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강경한 공산주의자 구스타프 후사크였다. 숙청은 당은 물론 국가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를 휩쓸었다. 권력을 장악한 당료들은 동독에 필적하는 교조주의적 체제를 도입했다. 프라하의 봄의 참여자와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이 만연했고, 수만 명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망명길에 올랐다.
참고 문헌
- Jacek Tebinka, 『왜 폴란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가담했는가?』, Polityka 역사 가이드, 2018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