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를 경악에 빠뜨린 '차가운 외과의사'
1984년 6월 4일 사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에게 사람들은 강간범, 타락자, 네크로필리아, 소아성애자, 정신병자, 짐승이라는 오명을 붙였다.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차가운 외과의사'라 불린 에드문트 콜라노프스키의 변태적인 범죄는 폴란드 역사에서 전례 없는 것이었고, 그 사건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어린 시절
"네가 처음 목욕할 때 익사시켜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막내 아들 에드크에게 경멸과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첫째 아들 안제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상처를 계속 긁어대듯 에드문트를 자주 무덤에 데려갔다. 이것이 아이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음은 분명하다.
1947년 10월 24일에 태어난 훗날의 연쇄살인범은 어머니 외에도 여러모로 고단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했고, 에드문트 역시 어릴 때부터 잦은 병치레로 또래보다 발달이 느렸다.
문제적인 성격도 일찍 드러났다. 신경질적이고 안정감이 없어 학교에서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선생님과 다투고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정작 대인관계에서는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은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학업 부진과 정신적 문제로 십대 시절 그는 여러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한 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도움은 되지 못했다. 병원과 요양원에서 보낸 시간 동안 소년의 마음속에는 정신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타락한 청년기
콜라노프스키는 여성에 대한 성적 매력을 매우 이른 나이에 발견했다. 10~11세에 이미 성적으로 성숙해 있었지만(다른 영역의 인격 성장과는 대조적으로), 주변 누구도, 심리학자조차 그것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그는 여성 속옷, 특히 입던 것과 더러운 것을 훔쳐 몸에 걸치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한 요양원에서는 연상 환자들에게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시체 보관실 창문으로 여성 시신을 훔쳐보며 자위했다.
곧 그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들을 습격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외로운 여성을 보면 다리에 힘이 빠졌다"고 증언했다. 15세에는 이미 소년법원에 성폭행 혐의로 회부되었고, 관계 시도에 여러 번 실패한 전력도 있었다.
과민한 성격, 병리적 행동 성향, 갈수록 깊어지는 성적 좌절, 그리고 몇 차례의 자살 시도 — 이 모든 것이 그의 정신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왔고, 그것은 몇 년 후 완전히 드러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이 에드문트는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 아내 조피아와 두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했다. 1972년경 무작위 여성에 대한 강간 미수로 수년간 수감되자 조피아는 이혼하고 모든 연락을 끊었다.
괴물의 탄생
경찰 기록과 그의 진술에 따르면, 첫 살인은 1970년 10월 28일 에밀리아노보 근처에서 저질러졌다. 그는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가슴을 절단하고 생식기를 적출해 종이에 싸서 포즈난의 자기 집까지 가져왔다. 동시에 새로 묻힌 여성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훔쳐 그 위에서 자위했으며, 묘지 예배당에서도 같은 짓을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시신을 훼손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1980년 7월, 노바술의 예배당에서 이렇게 훼손된 노년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1981년 3월 17일에는 바르샤바 근교 바베르에서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20세 여성의 시신에서 비슷한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언론은 침묵했다. 공산 당국은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에 변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2년 겨울의 범죄는 더 이상 덮을 수 없었다. 11월 4일, 포즈난의 11세 소녀 알린카는 방과 후 근처 초원에서 토끼 먹일 풀을 뜯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포즈난 익스프레스' 등 언론이 실종을 보도했지만, 비밀경찰이 나라모비체를 샅샅이 뒤져도 단서는 없었다.
철도 제방에 버려진 소녀의 시신은 몇 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가슴과 생식기가 절단된 상태였다. 이전 시신들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상처는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포즈난 일대를 정신병자가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흔적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9일, 미워스토보 묘지에서 특징적인 훼손 상태의 시신이 든 파묻힌 무덤이 발견되었다. 당국은 즉각 움직였고, 형사들은 포즈난의 묘지들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네크로필 체포 작전
5월 7일 밤, 두 명의 경찰관이 미워스토보 묘지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용의자를 발견했다. 용의자는 도주했지만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바로 '폴레나 라스카제프' 도장이 찍힌 종이였다. 이것은 포즈난의 한 공장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5월 16일, 에드문트 콜라노프스키가 체포되었다.
초반에 혐의를 부인했던 그는 곧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는 저지른 살인을 자백했다. 총 여섯 명의 여성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증된 것은 세 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기와 절제된 신체 부위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양들의 침묵'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에드문트는 자위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마네킹에 절단한 가슴과 생식기를 꿰매 붙였고, 그것을 '즐거움'이라 불렀다. '차가운 외과의사'는 경찰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꿰매 붙인 장기에 음경을 삽입해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사출했다. 이틀이나 사흘 후에는 장기를 뜯어내 방의 난로에서 태웠다. 인형은 부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의 '유희실'은 도심 보드나 거리 아파트의 헛간 격 방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웃들은 이상한 악취를 호소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출소 후 그와 엮인 내연녀 역시 침묵했다. 그녀는 연인의 변태성을 알고 있었고, 난로에서 타버린 시체 잔해를 발견했지만 위협을 느껴 그가 검거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재판과 최후
'외과의사'의 재판은 1984년 1월 22일에 시작되어 6월 4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형은 2년 후인 1986년 7월 28일 집행되었는데, 이는 포즈난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이었다. 콜라노프스키와 면담한 심리학자들과 수사관 일부는 그의 행적만 보면 중요한 학술 논문과 '몇 개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수 있는 인물이니, 감옥이 아닌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에드문트 콜라노프스키는 미워스토보에 묻혔다. 그가 예전에 배회하던 바로 그 묘지다. 그의 무덤은 최근까지 이름 없이 방치된 무명의 무덤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