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으로 좁은 방에 짓꽂힌 희생자들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최대 30분 동안 동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나치는 이런 방식으로 최대 100만 명을 '인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인들은 가스실에서의 죽음이 빠르고 고통 없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클론 B(Zyklon B)가 결코 인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고통은 길게는 30분까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질식하며 비좁게 몰려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지러움을 느끼고, 구토를 했습니다.
동료 수용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호흡기 마비와 함께 찾아오는 극심한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게다가 희생자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치클론 B의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더 이상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장은 "가스실에서 끌어낸 시신에 휘발유를 부어 태울 때, 가장 어린 수용자들을 그 불길 속에 함께 태워 죽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치에게 유대인은 벌레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벌레는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급적 살충제로 말입니다.

잿더미가 된 범죄의 도구
치클론 B는 정확히 어떤 물질이었을까요? 19세기 말부터 알려진 이 약제는 독일 데게슈(Degesch) 컨소시엄이 생산한 것으로, 청산수소를 적셔 넣은 규조토 덩어리 형태였습니다. 섭씨 27도 전후의 온도에 노출되면 이 치명적인 화합물은 기체로 변환되었습니다. 이 약제는 '치클론 B'라는 상품명으로 판매되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특허를 등록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무색·무취의 위험한 독가스임을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눈 자극제가 살인 입자에 첨가되었습니다. 하지만 파트리시아 포스너(Patricia Posner)가 저서 『아우슈비츠의 약사』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SS 기술 소독 부문을 이끌었던 쿠르트 게르슈타인(Kurt Gerstein)은 SS에 판매되는 치클론 B에서 경고용 자극제를 제거할 것을 데게슈에 강력히 요구했다. (...) 그는 회사 제품이 절멸에 사용될 처참한 세부 사항을 이사회에 보고했다. 그는 가스에 처해질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광범위한 공황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자극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이사들에게 통보했다.
데게슈의 이사들이 명령에 따르는 데 도덕적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해도, 그들은 그런 마음을 빠르게 떨쳐냈습니다. 1942년부터 SS가 주문한 천문학적인 양의 치클론 B 덕분에 회사의 이윤은 폭등했습니다. 마치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통계처럼 말입니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수용자들은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샤워'를 마친 후에 옷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실험용 '모르모트'
처음에 치클론 B가 아우슈비츠로 반입된 목적은 완전히 무해한 것이었습니다. 기숙사와 의류를 소독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공급업체는 테스타(Testa) 회사였습니다. 1942년 1월 20일 반제(Wannsee)에서 SS 고위 간부들과 제3제국 각료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린 이후에야 치클론 B는 대량 학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 작용은 그 이전부터, 아직 미숙하게나마 시험된 바 있었습니다.
살충제를 이용한 최초의 인체 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마도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본수용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1호 블록 감방에서 가스로 살해된 '실험용 모르모트'는 소련군 포로와 폴란드인 수용자들이었습니다. 로저 무어하우스(Roger Moorhouse)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첫 번째 실험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폴란드인 수용자 아우구스트 코발치크(August Kowalczyk)가 회상하길, 다음 날 아침에도 일부 희생자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는 치클론 B의 투입량이 부족했거나 가스가 벽의 틈새로 새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또 다른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이번에는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가 참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후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향한 시도들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수용소의 수석 약사 빅터 카페시우스(Victor Capesius)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살충제 배송을 담당하느라 두 손이 모자랐습니다. 특히 그는 단순히 치클론 B를 수용소 약국으로 운반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파트리시아 포스너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카페시우스의 가장 신뢰받는 조수 중 한 명이었던 유대인 수용자 출신 약사 프리츠 페터 슈트라우흐(Fritz Peter Strauch)의 증언에 따르면, 카페시우스가 보관한 치클론 B에는 경고 성분이 들어 있지 않았거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데게슈는 오직 사람을 가스로 살해할 목적으로만 이 물량을 생산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된 빈 용기 더미
그러나 카페시우스는 단순한 독극물 창고 관리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다른 증인들은 그가 절멸 기계에서 훨씬 더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치명적인 치클론 B 용기를 직접 가스실로 운반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아몬드 향과 함께 찾아온 죽음
범죄 절차가 완성되고 나자 처형은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 대상 수용자들은 가스실(종종 샤워 시설을 갖춘 목욕탕으로 위장됨)로 이송되어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밀봉된 문이 뒤로 닫히고, 벽이나 천장의 개구부를 통해 독성 입자가 던져 넣어졌습니다. 이후 남은 일은 시신을 '정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치클론 B는 희생자들에게 어떤 일을 일으켰을까요? 로저 무어하우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살충제는 열과 습기의 영향으로 기체로 분해되었다. 치명적인 약제가 투입된 구멍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몇 분 안에 사망했고, 조금 떨어져 서 있던 사람들은 그보다 늦게 숨을 거두었다.
모든 희생자는 먼저 의식을 잃은 뒤 심장 마비를 겪었다. 증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약 15분이 지나면 가스실 안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살해된 시신에는 종종 분홍색 변색이 나타났고, 때로는 푸른 반점도 보였다.
청산수소는 적혈구를 통한 산소 교환을 차단하고 조직 호흡을 방해함으로써 이른바 '내부 질식'을 일으킵니다. 동시에 매우 효율적이기도 합니다. 루돌프 회스는 전후 증언에서 살충제 5~7kg이면 1,500명을 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어하우스가 정리하듯, "결국 독일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약 100만 명을 살해했으며, 주로 비르케나우에서 이루어졌다. 이 단 하나의 수용소만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24톤의 치클론 B를 사용했다." 치클론 B 용기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날은 1944년 11월 2일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