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 '기생충'이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불임 수술이 민족을 강하게 만든다"며 절제를 내세웠지만, 그들의 목표는 장애인의 불임화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의 독일인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는 국가가 '가장 완벽한 인류'를 길러내기 위해 시민의 출산에 깊이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생학의 논리를 구현한 이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제3제국에서는 그것이 미친 듯한 극단으로 치달았고, '결함이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조차 가능한 선택지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종 이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경제적 계산 역시 큰 몫을 했습니다. 나치가 '기생충'이라 부른 이들은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병상을 차지하며, 부상당한 국방군 병사 치료 등에 투입될 수 있었던 의료 인력을 잡아먹는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40만 명이 강제 불임화 당하다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인 1933년 7월, 자손에게 정신적·신체적 결함을 유전시킬 수 있는 유전병 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강제 불임화 법률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녀를 대상자로 분류하는 기준은 지나치게 모호하여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거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조차 수술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불임화 덕분에 민족은 강해진다"는 구호 아래 1944년까지 약 40만 명이 생식 능력을 빼앗겼습니다.

히틀러 집권 직후 나치는 국민을 '정화'한다는 명분의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동시에 더 급진적인 조치, 즉 환자의 계획적 살해를 향한 예비 작업도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끔찍한 선전 캠페인을 통해 여론의 땅을 고른 것입니다. 뉴스릴에는 변형 정도가 가장 심한 장애인들이 골라 등장했고, 영상은 관객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연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퇴화자'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려 한 것입니다.
T4 — 장애인 대량 살해 계획
'안락사' 작전에는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있던 본부에서 딴 코드명 'T4'가 붙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안락사'란 명백한 완곡어법입니다. 이 사업 전체는 자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차갑게 계획된 집단 학살이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어두운 범죄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의사', 즉 언제나 환자를 치료하고 구해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구속된 사람들이라 주장한 자들의 손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입니다. 무자비한 살인 의사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는 히틀러의 담당 의사였던 카를 브란트(Karl Brandt) 박사였습니다.
작전은 처음인 1939년 8월, 오직 병든 독일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특별 병동에서 페노바르비탈을 투여받거나 굶어 죽도록 방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소 5,000명의 어린 환자가 이런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독일 과학자들의 '연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어 히틀러의 1939년 9월 1일자 명령에 따라 성인 환자 말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국 영토 내 정신병원이나 요양 시설 부지에는 6개의 살처분 센터가 준비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이곳에서 '소독'된다는 이름으로 일산화탄소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해된 이들은 가장 값진 소지품을 강탈당했습니다. 금니마저 뽑힌 뒤 시신은 화장터에서 태워졌고, 타지 않은 뼈 조각들은 전동 분쇄기로 갈아졌습니다. 재는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버려졌습니다. 환자가 도착한 순간부터 시신이 '뼛가루'로 처리될 때까지 전 과정은 겨우 몇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가족은 환자 부양 비용을 더 걷어내기 위해 한동안 사망 사실조차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결핵이 아니라 집단 학살
이 범죄의 흔적을 지우고 실상을 감추기 위해 사망 서류는 그럴듯하게 꾸며졌습니다. 사망 원인과 장소에는 허위 정보가 기재되었습니다. 환자들이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질병 가운데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결핵이었습니다. 서류에 자주 등장한 사망 장소는 총독령 동부 변경의 마을 헤움(Chełm)에 있던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아케티온 T4 초기에는 병든 아이들만 살해되었습니다. 사진은 쇤브룬 정신병원의 어린 환자들입니다.
장애인 제거 과정에서 개발·시험된 이 대량 학살 시스템은 훗날 폴란드에 세워진 독일 절멸수용소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베우제크 수용소의 훗날 소장인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 같은 범죄자들이 바로 T4 작전 기간에 첫 '기술'을 익힌 인물들이었습니다.
1941년 8월 21일 T4 작전이 공식 종료될 때까지 7만 명이 넘는 제국 신민인 장애인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해가 계속되었으며, 달라진 것은 살해의 방식과 장소뿐이었습니다.
참고문헌
이 글은 다리우스 칼린스키(Dariusz Kaliński)가 저서 『피해의 결산(Bilans krzywd) —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