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테니아인들은 그의 위력 앞에서 떨었다. 독일인들은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도 그를 깊이 존중했다. 바이킹들은 그와 전장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대체 무슨 까닭에 그의 전사들은 무적일 수 있었던 것인가?
군주와 드루지나(친위 전사단)는 한 열매의 두 반쪽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였다. 군주는 원정을 조직해 전리품과 노예를 실어 나르게 했고, 이를 통해 전사들을 부양할 재원을 마련했다. 어느 면에서 군사 원정은 국가 운영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헝가리의 역사가 죄르지 죄르피는 이렇게 설명한다.
권력의 유지는 언제나 통치자가 자신의 무리에게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주고, 끊임없는 혜택으로 충성을 묶어둘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군주에게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고 군대를 지원할 수입이 없고, 전리품 가득한 원정을 벌일 수 없다면, 전사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든가 반란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키예프 원정 당시의 볼레스와프 흐로브리와 그의 친위대. 카롤 스토비에츠키 삽화.
물론 이런 구조는 폴란드만의 특산물이 아니었다. 체코나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작동했다. 그럼에도 모든 이웃 나라를 압도한 것은 볼레스와프였고, 폴란드 초대 국왕의 정복 목록은 그 자체로 압권이다. 올로모우츠가 있는 모라비아, 프라하가 있는 보헤미아, 루사티아, 마이센, 키예프, 여러 프로이센 부족의 땅,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 그리고 미스터리의 땅으로 불리는 셀렌차까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비참하게 죽는다
흐로브리는 넉넉히 보수를 지급했지만, 그만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폴란드 군대는 엄격한 규율의 군대였다. 볼레스와프 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한 안제이 나돌스키는 이렇게 강조했다.
사료에는 용맹공의 폴란드군 안에서 군기가 흐트러졌다는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군은 바람직한 규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기록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흐로브리는 전사들을 아꼈지만, 그 대가로 절대적 충성을 요구했다. 미하우 빌리나의 그림 「볼레스와프들의 친위대」.
규율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되는지도 보여주었다. 1013년 볼레스와프는 유목민 페체네그족 전사들의 지원을 받아 루테니아로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 이 동맹군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폴란드 군주는 결과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동맹군을 공격해 몰살시켜 버렸다!
동시에 볼레스와프는 충성스러운 백성들의 피를 함부로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후퇴하며 정면 결전을 피했다. 1004년 독일군 접근 소식을 듣고 프라하에서 철수한 것이 그랬고, 1005년 제국과의 전쟁에서 포즈난 방향으로 물러난 것도, 1018년에서 10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키예프에서 철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돌스키의 평가가 정확하다.
용맹공의 군대는 자주 후퇴했다. 그러나 추측컨대 폴란드군은 단 한 번도 와해되거나 총붕괴로 치닫지 않았다. 대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추격해 온 적은 재편성된 저항선과 다시 마주쳤다.
때로는 볼레스와프의 전사들이 싸움이 하고 싶어도 공작의 명령에 막혀야 했다. 1010년 독일왕 하인리히 2세가 폴란드로 진입했을 때, 볼레스와프는 그워구프 성벽 위에서 불타는 마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군들은 야전 결전을 촉구했지만 흐로브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쓸데없이 학살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전리품을 실은 독일군은 제국으로 돌아갔지만, 공작은 전사들을 살려두었고 곧 기회를 잡아 침략자들에게 피로 값을 치렀다.
원정을 거듭할수록 더 영리해진 상대를 이겼다
볼레스와프의 권력을 무너뜨릴 뻔했던 상대는 앞서 언급한 독일왕 하인리히 2세였다. 그의 첫 번째 폴란드 원정은 1004년 2월에 시작됐다. 겨울은 이런 작전에는 드문 계절이었다. 통상 '전쟁의 계절'은 늦여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비잔틴의 군사 교범들은 슬라브족은 숲의 잎이 없어 은신처가 사라지고, 눈이 도망자 추적을 쉽게 해 주는 겨울에 공격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인리히 2세는 용맹공을 결정적으로 무찌를 기회가 가장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긴 항쟁 끝에 볼레스와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설보와 이어진 급격한 해빙이 독일군을 발목 잡았다. 눈더미를 헤치고, 그다음에는 진창을 걸어갈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하인리히 2세는 여름이나 초가을에 폴란드를 공격했지만, 매번 결과는 더 나빠졌다. 1015년 그가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보냈을 때, 볼레스와프는 두 개를 차단하고, 세 번째는 오스트리아 방면 기습이라는 배후 타격으로 발을 묶었으며, 네 번째는 늪지로 몰아넣어 피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2년 뒤인 1017년, 독일 군주는 더 이상 병력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니엠차 성벽 앞에서 발이 묶였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해 기록을 남긴 연대기 작가 티트마르는 이렇게 적었다.
황제는 여러 종류의 공성 기계를 건조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내 적진에도 아주 흡사한 기계들이 나타났다. 포위당한 자들이 더 큰 인내심과 더 치밀한 재주로 방어를 강구한 경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 그들은 행운이 찾아와도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고, 역경을 맞아도 격한 불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2세는 패배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1017년 니엠차에서 또다시 패배의 쓴맛을 삼켜야 했다.
3주 후 하인리히 2세는 총공격을 명령했지만, 고생 끝에 만든 공성 기계는 "성벽에서 던져진 불에 금방 타버렸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패배한 황제는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우바 경도 감탄할 꾀
볼레스와프는 때로 씽키에비치 소설 속 인물 자고우바 경도 흠모할 만한 계략을 구사했다. 당대 사람들이 지형에 밝았다 해도, 중세 군대는 현지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005년 흐로브리는 독일군을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를 통과시킬 예정이던 안내인들을 매수했다. 그 결과 하인리히의 군대는 가장 짧은 길 대신 늪과 황무지 속을 며칠간 헤매고 말았다.
공작은 부대 간 소통에도 신경을 썼다. 전령은 부대와 부대 사이를 순식간에 오갔다. 대부분의 정보는 암기해야 했고, 때로는 숫자를 나무 막대에 새겨 전달하기도 했다.

흐로브리는 기습의 달인이었다. 적이 가장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을 골라 놀라게 할 줄 알았다. 19세기에 그려진 용맹공 친위대의 활약상.
그는 갑작스러운 일격으로 적을 놀라게 할 줄도 알았다. 여기에는 폴란드산 말의 공이 컸다. 외모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다른 장점이 있었다.
특히 교통·통행 조건이 나쁠 때 이 말들은 높은 실용성을 보여준다. 해빙기의 물러진 땅 위를 잘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자주 강조된다.
그렇다면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말대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볼레스와프 흐로브리는 이 부분에서도 완벽주의자였다. 이웃 나라 어딘가에 정치적 혼란이 생기기만 하면, 피아스트의 전사들은 즉시 모습을 드러내 새 땅을 차지했고, 때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친구였던 황제 오토 3세의 죽음 소식에 폴란드 공주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곧바로 제국으로 진격해 루사티아와 마이센을 자신의 지배 아래 넣었다. 전투도 피 흘리는 싸움도 없었다. 루사티아의 독일 귀족들은 스스로 폴란드 공작에게 조공을 바쳤다.
프라하 점령도 비슷했다. 흐로브리는 먼저 체코 정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두었다. 잔혹한 사촌 볼레스와프 3세('붉은 공')를 보헤미아 왕좌에 앉힌 것이다. 그가 정적 살해에 손을 댄 틈을 타, 흐로브리는 그를 속여 눈을 멀게 하고 마지막 정의로운 자라며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역사적 기억 속에서 — 1945년 서부 국경의 정당성을 찾던 선전이 한몫한 바도 있지만 — 볼레스와프 용맹공은 독일 세력과 수십 년간 싸운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물론 그는 독일왕과 싸웠다. 그러나 동시에 폴란드 초대 국왕은 극도로 유연한 정치가였다. 루스를 공격할 때 — 1013년이든 1018년이든 — 언제나 하인리히 2세가 보낸 증원군이 그를 지원했다.
볼레스와프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든 동맹을 찾을 줄 알았다. 이탈리아의 대귀족들과 룩셈부르크 백작들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이름 없는 영웅들
아버지 미에슈코 1세의 중장기병에 대해서는 이미 "그들의 백 명은 다른 전사 천 명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용맹공의 병사들 역시 전투에서 돋보여야 했고, 폴란드 전사들의 사기는 분명 높았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 교차기 지휘관들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졌다. 외국 기록 덕분에 우리는 겨우 몇 사람을 안다. 성 아달베르트의 형제인 체코 공자 소비에스와프, 독일 출신 기사 에리크, 그리고 직책은 논란이 있지만 용맹공의 이름으로 두 차례 제국에 파견된 스토이그니에프 정도다.

용맹공과 그의 친위대의 위업에 대한 기억은 10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마르첼로 바치아렐리가 그린 군주 초상.
남은 것은 주로 창과 도끼, 활로 무장하고 값비싼 검은 드물게 쥔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전사들의 모습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볼레스와프 용맹공의 지휘 아래 그들은 기이한 위업을 이뤄냈고, 그 기억은 천 년을 버텼다. 폴란드 초대 국왕은 피아스트 왕조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은 정복자였다. 그리고 이는 과장이 아니다.
"누가 그의 용맹한 위업과 이웃 민족들과의 전투를 합당하게 노래할 수 있겠는가? 글로써 기억에 전할 수 있으랴?" 갈루스 아노니무스는 수사학적으로 물었다. 물론 이 연대기 작가의 붓 아래에서 흐로브리는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군사적 성공의 경우에는 더 오래되고 외국인이 남긴 사료로 갈루스의 기록을 교차 검증할 수 있다. 그리고 검증할 때마다 갈루스는 놀랍도록 옳았다. 흐로브리는 전쟁의 천재였다.
주요 참고 문헌
사료:
- 갈루스 아노니무스, 『폴란드 연대기』, 로만 그로데츠키 옮김, 마리안 플레지아 편, 브로츠와프·바르샤바·크라쿠프 1999.
- 『티트마르 연대기』, 마리안 지그문트 예들리치 옮김, 포즈난 1953.
연구서:
- 로만 바르나트, 『갈루스 아노니무스의 기록에 비춰 본 용맹공 볼레스와프의 무력』, 『역사 평론(Przegląd Historyczny)』 88권, 1997.
- 안제이 F. 그랍스키, 『용맹공 볼레스와프: 정치·군사사 개요』, 바르샤바 1964.
- 죄르지 죄르피, 『성 이슈트반 1세, 헝가리의 왕』, 바르샤바 2003.
- 헨리크 워비민스키, 『폴란드의 기원』 5~6권, 바르샤바 1973·1985.
- 미하우 모리스트바롭스키, 『권력의 탄생: 용맹공 볼레스와프의 모든 정복』, 크라쿠프 2017.
- 안제이 나돌스키, 『용맹공 볼레스와프 시대의 폴란드 무력: 전략과 전술 개요』, 우치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