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스테판 바토리 — 종자 출신에서 천재적 지도자, 폴란드 왕까지

그는 종자(시종)로 경력을 시작해 마침내 왕좌에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처럼 대우받기를 원했던 그에게 타고난 것은 정치적 재능과 전략적 감각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쟁취해야 했고, 언제나 기회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 강박적이고도 노련한 사냥꾼이었던 그는 그런 기회들을 완벽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발루아의 앙리가 1574년 6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 사이 파리로 도주한 길 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먼지가 가라앉았지만, 귀족들은 새 통치자를 뽑는 일에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발루아의 지지자 일부는 그의 귀환을 기대하며 청원과 협박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넘는 왕위 공석기 끝에 마침내 새 군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 스테판 바토리가 그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572년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 폴란드 왕위의 유혹을 받은 바 있었지만, 야기엘워 왕조 이후 권력을 두고 거물급 인사들과 경쟁하기에는 자신이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사실상 막판에 후보로 등록된 것이었지만, 그의 입지가 불리하지만은 않았다.

지도자이자 정치가

활동적인 이 트란실바니아 공작은 오랫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차근차근 쌓아 왔다.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트란실바니아에서 바토리는 처음에는 친합스부르크 성향의 친척들 편에 섰다. 그러나 이후 확실하게 진영을 바꿔 1557년부터 샤트마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세력과 싸웠고, 에거와 테메슈바르 공성전에도 참전했다.

그의 공을 인정받아 샤트마르 요새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어 튀르크와 오스트리아의 침입을 막는 요충지인 대바러드(너지바라드)의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1562년에는 트란실바니아군 총사령관으로서 황제 페르디난트 1세 지지파의 군대와 하다드 성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고 자신도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이 입은 막대한 손실은 황제 측으로 하여금 휴전을 체결하게 만들었다. 1564년 바토리는 다시 한번 합스부르크 지지파와 충돌했다. 샤트마르 공성전에서 그는 요새를 함락하는 기발한 방법을 선보였는데, 병사들이 목장에서 돌아오는 소떼를 몰아 도시를 강습하게 한 것이다.

스테판 바토리 — 종자 출신에서 천재적 지도자, 폴란드 왕까지

스테판 바토리는 훌륭한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이미 트란실바니아 공으로서 바토리는 빈이 트란실바니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에 성공적으로 맞섰다. 공국의 군대는 카스페르 베키에시가 지원하는 제국군을 기동전으로 압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켈레이인들과의 합류를 막았다. 세켈레이인은 트란실바니아 동부에 살던 튀르크-불가르계 혈통의 마자르화된 민족으로, 자유민 신분으로 특별한 특권을 누렸으나 16세기에 들어 크게 제한되었다.

그 결과 1575년 7월 10일 케렐뢰센트팔에서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벌어졌고, 전투는 바토리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다. 포위당한 베키에시의 병사들은 머루슈 강 물살에 몸을 던졌고, 그곳에서 죽음만을 맞이했다. 베키에시 본인은 전장에서 탈출했지만, 바토리는 포로로 잡은 여섯 명의 지휘관에게 참수형을 명했고, 나머지 포로들은 코와 귀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 대승은 바토리가 유능한 지도자이자 활동적이고 단호한 통치자라는 평가를 굳혔다. 더욱이 전쟁터에서 쌓은 경험은 그로 하여금 안락함을 경멸하게 만들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무뚝뚝하고 행동은 격렬하게 만들었다.

선거

그는 홍보에 가까운 활동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바토리를 위한 선전 운동은 그의 주치의이자 비공식 대변인인 예르지 블란드라타가 이끌었다. 주군을 치켜세우며 그는 주군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충실함, 행동의 정직함, 타고난 겸손함, 전장에서 쌓은 경험, 평화와 정의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공의 의사에 따르면 바토리의 가장 큰 장점은 완벽한 기억력이었다. 동시에 그는 바토리가 폴란드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당시 공용어 역할을 하던 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이질적인 나라를 통치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언어 장벽은 해소될 것이라고 밝혔다.

선거는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귀족들과 유력 세력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중 선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귀족들은 황제 막시밀리안을 왕으로 추대한 반면, 얀 자모이스키가 이끄는 일반 슐라흐타 대중은 남편감으로 스테판 바토리를 제안받은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안나 야기엘론카를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후보들의 결단력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바토리가 훨씬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선거에 필요한 경비로 10만 길더를 할당하고 폴란드에 4천 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덕분에, 그리고 크라쿠프로 향하는 대신 먼저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 참석하느라 발이 묶인 막시밀리안의 우유부단함 덕분에, 바토리는 권력 경쟁에서 최종 승리했고 1576년 5월 1일 폴란드 왕좌에 앉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비유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폴란드에 와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성공 커리어를 쌓았다는 것이다.

스테판 바토리 — 종자 출신에서 천재적 지도자, 폴란드 왕까지

스테판 바토리는 권력 경쟁에서 승리했다.

갓 즉위한 왕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고귀한 미모의 영주로, 꽤 곱슬머리에 긴 얼굴, 붉은빛이 도는 검은 수염, 검은 머리카락, 놀랍도록 하얀 이빨을 지녔으며, 아틸라가 흔히 그려지듯 살짝 휘어진 매부리코를 가졌다.”

왕은 이렇게 그려졌지만, 그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토리는 통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폴란드 왕관은 그에게 커다란 도약이었지만,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먼저 내부 문제부터 정리해야 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넘쳐났고, 돕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왕은 귀족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갔고, 그 결과 바토리는 '헝가리 폭군'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왕이 느긋한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진정한 통치자라는 사실은 대관식 직후 드러났다. 바토리는 황제 막시밀리안의 지지자들을 처리하며 그들의 거점인 란츠코로나 성을 점령했고, 앞서 막시밀리안을 폴란드 왕으로 선포했던 우한스키 대주교와도 합의에 이르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왕령 프로이센이 새 왕을 인정했고,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호엔촐레른조차 사절을 통해 그에게 충성 서약을 올렸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단치히(그단스크)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 함께 바토리의 현대적 군대 개편 구상, 그리고 러시아와의 승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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