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밤, 그리고 그 전조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제3제국 정부가 오랫동안 계획해 온 테러의 서막이었다. 단 이틀 후, 헤르만 괴링은 '유대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뒤 최종적으로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
1933년, 재앙의 시작
1933년은 독일 유대인들에게 극히 중요한 시기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그의 지지자들은 누구도 이 민족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대인 공무원들은 하나둘 직장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프랭크 맥도너프는 저서 『히틀러의 시대: 승리 1933~1939』에서 당시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유대인 아놀드 비겔슨의 증언을 인용한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33년에 문제가 시작됐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등장하자 제 커리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비겔슨은 결국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과 사회주의 지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은 대학에서도 벌어졌다. 1933년 9월까지 1,145명의 강사가 직위를 잃었는데, 이는 전체 교직원의 약 15%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같은 해 4월 25일에는 '독일 학교 과밀 방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목적은 유대인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를 노골적으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법은 '비아리아' 출신 학생 수를 1.5%까지 축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 결과 독일 대학과 학교의 유대인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문화계 숙청
1933년 5월 13일, 요제프 괴벨스는 국민계몽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문화계 전반에 걸친 대규모 숙청이 시작되었다. 오토 클렘페러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연주회는 취소되었고, 4월 6일에는 함부르크 필하모니 협회가 유대인 솔리스트들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발에도 나치의 태도는 의외로 침착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괴벨스에게 항의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을 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절제된 답변을 받았다. 심지어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제3제국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는 결국 선전 기계에 끌려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일은 잦아들었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국가 통제 아래 놓였다. 그 역시 제3제국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았다. 그는 한 번도 NSDAP(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나치' 동료들에게 여전히 널리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숙청은 독일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차례차례 진행되었으며, 특히 필하모닉과 오페라 등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폭력으로 무장한 돌격대
1933년부터 NSDAP 돌격대(SA)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살해하기 위한 잔혹한 행동에 나섰다. 히틀러가 집권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법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1933년 6월까지 유대인 출신 43명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집들을 부수고, 유대인들에게 나치 독일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각인시켰다.
1933년 한 해에만 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독일에서 이민을 떠났다. 혼혈 유대인 한스 페터 헤르츠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곳에는 더 이상 우리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 주방 창문과 현관 위의 유리를 깨버렸습니다. 문에는 다윗의 별을 긁어 새기고 '유덴 라우스(Juden Raus, 유대인은 꺼져라)'라는 낙서를 남겼죠."
NSDAP 내부에서 반유대주의는 너무나 만연했기에, SA의 전투 구호 중에는 이런 가사까지 있었다. "유대인의 피가 칼날 아래에서 뿜어져 나올 때,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것이다."
이미 존재하던 강제수용소 역시 잔혹함으로 '자랑'할 만했지만, 국제 여론으로부터는 이를 감추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미국 기자 에드거 모러는 다하우 수용소의 유대인 수용자 한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카고 트리뷴지에 수용자들이 겪는 처우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 보도에 대한 반응으로 다하우 현장 방문이 조직되었고, 외신 기자들은 주장의 진실성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뉴욕타임스 통신원은 수용소의 분위기를 "철저한 규율의 연대와 고된 노동 감옥 사이 어딘가"라고 묘사했다.
보이콧 선포
시간이 흐르면서 외신들은 독일 내 반유대주의 활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반나치 시위까지 열렸다. 그러나 이 시위는 예상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국제적 항의에 대한 대응으로 괴벨스는 독일 내 유대인 관련 사업체에 대한 하루짜리 보이콧을 선포했다. 1933년 4월 1일, 그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유대인 상점이 문을 닫았다. 입구 앞에는 SA 초소가 세워졌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날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 호러스 럼볼드 경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렸다. 그는 이 보이콧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괴벨스의 구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15만 명의 노동자가 '외세의 허위 보도'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원되었다. 같은 날 저녁에는 10만 명의 히틀러청년단원이 거리 행진을 벌이며 베를린을 채웠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마음
1933년에는 유대인을 명시적으로 겨냥한 법률만 무려 80건이 제정되었다. 이듬해에는 SA의 폭력적 행태 때문에 규정 수가 15건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는 외부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잠시 풀어둔 것에 불과했다.
이미 1935년에는 반유대인 시위의 물결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이 시기 폭동이 일어나고, 상점들이 파손되었으며, 모욕적인 반유대주의 구호가 곳곳에 낙서되었다. 거리에서는 인형이 불태워졌고, 유대인 묘지가 유린당했다. 특히 뮌헨은 이러한 활동에서 두드러진 곳이었는데, 그 거리에서는 '마치 서부 개척 시대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고 전해진다.
폭동의 주요 세력은 SA 폭력단원, 히틀러청년단원, 그리고 망명 생활 중이던 오스트리아 나치들이었다. 『히틀러의 시대』에는 바이에른 지역 독일 사회민주당 비밀 대표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난 우려스러운 변화를 이렇게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유대인 박해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어떠한 적극적인 반응도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인종 선전은 눈에 띄지 않게 흔적을 남긴다.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공정한 시선을 잃어가고, 많은 이들이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치가 유대인과 싸우는 것이 실은 옳다고."
바로 이러한 국민 사고방식의 전환에서,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벌어진 사건들까지는 짧은 길이었다.
파멸을 예고한 수정의 밤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는 당일 밤 10시 50분, 당과 국가 당국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 밤에 91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약 1,000곳의 회당에 불이 붙어 그중 267곳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인 상점 9,000곳 가운데 거의 7,500곳이 파손되었다.
프랭크 맥도너프는 『히틀러의 시대: 승리 1933~1939』에서 그 운명의 밤을 목격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베를린 통신원 휴 그린의 증언을 인용한다.
"베를린은 종일 저녁까지 폭력에 시달렸고, 폭도들의 무리는 파괴의 난교에 빠져 있었다. 지난 5년간 독일에서 몇 차례의 반유대인 폭동을 목격했지만, 이번만큼 역겨운 사태는 본 적이 없다."
크리스탈나흐트는 독일 민족을 '결정화'하고 인종을 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한 이 이름은 유대인 상점과 주택에서 독일 도시의 거리로 쏟아진 유리 조각과 수정 파편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