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지금도 강렬한 감정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연구에서는 두 사람의 성격 분석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왔으며, 양국 정부 기록 보관소와 당사자들의 개인 소장 자료 속 공식 문서를 통해 그들의 관계가 폭넓게 확인된다.
소련 기록 보관소의 문서가 공개된 지금, 비로소 더 완전하고 상세한 묘사와 분석이 가능해졌다. 소련 측 회담 기록은 영국 문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오랫동안 처칠과 스탈린 관계 평가의 기준이 되어 온 영국 문서보다 훨씬 덜 극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스탈린의 말에 따르면 처칠은 "당신 주머니에서 마지막 코펙까지 털어갈 사람"이었다. 처칠 역시 자신의 표현대로 수년간 소련 지도자와의 '작은 개인 전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두 지도자의 기밀 서신, 회담과 대화 기록이 드러내는 관계의 실체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눈빛을 보라"
처칠과 스탈린의 개인적 접촉은 전시 처칠의 대소련 관점,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지도자로서의 처칠에 대한 통념 속에서 복잡한 역할을 했다. 처칠 자신이 만든 이 서사의 주요 축 중 하나는 바로 '눈빛을 보는 것'이다. 즉 군사 협력에 열린 태도를 취하되,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버리고, 스탈린의 동유럽 계획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자세였다.
처칠의 태도를 깊이 연구해 온 역사학자들은 이를 그리 급진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접근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 여전히 등장한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영국 지도자의 견해와 태도에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부는 처칠이 수십 년간 이어온 볼셰비즘 혐오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처칠이 훨씬 덜 일관된 인물로, 반공 입장과 현실적으로 가능한 소련과의 협력 의지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처칠의 태도는 단순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공산주의(본국산이든 소련산이든)와 소련, 그리고 스탈린에 대한 상충하는 태도가, 공동으로 수행한 전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결합된 산물이었다.
처칠과 스탈린의 개인적 접촉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볼셰비즘에 대한 처칠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지만, 스탈린에 대한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탈린이 단순히 볼셰비즘의 가장 악랄한 병폐의 화신 이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1941~1945년 연합 시기 동안 형성된 처칠 태도의 역설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작은 개인 전쟁'
처칠은 스탈린과의 관계를 전시(戰時) 동료 지휘관으로서 키워감으로써 자신의 상충하는 충동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히틀러 격퇴라는 사명에서 소련을 강력하고 중요한 파트너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구,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수법과 과거 및 현재의 목표에 대한 의혹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물러서는 반응이 그것이다.
어느 정도 처칠은 두 명의 위대한 동맹국 지도자에게 상상 속 이미지를 투영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그려낸 이미지는 이 복합적인 인물을 부분적으로만 반영한 것으로, 어느 정도의 낭만주의와 망상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영국이 필요로 하는 미국의 구현체가 되었다. 그가 스탈린에게도 유사한 방식의 투영을 했다고 믿을 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다.
소련 지도자의 경우, 처칠은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스탈린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전우애(brotherhood in arms)'로 여기며 그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게도 투영했다. 루스벨트에게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이었다.

본문은 벨로나(Bellona)에서 출간한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의 『처칠과 스탈린: 유독한 형제들』의 발췌입니다.
처칠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초기 경력 역시 영국 총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예고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1920년대 영국은 신생 소련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처칠은 1919~1920년 연합군의 러시아 개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훗날 스탈린에게 털어놓았듯 자신의 '작은 개인 전쟁'을 수행했다. 요컨대 처칠은 영국 제국주의의 원형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
때로는 1930년대 중반 유화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처칠이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블린의 반소 감정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정적에 비해 처칠은 훨씬 유리한 빛을 받으며 비쳤다.
힘의 상관관계
그러나 서구 역사학 속 스탈린의 전통적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인물, 즉 인격적 요인에는 둔감하고 사람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리가 규정하는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는 '유형'으로만 보는 인물이었다. 이 관점의 변형으로는 스탈린의 어둡고 의심 많은 정신,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면모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었다.
이 어느 해석에서도 두 정치가 사이에 결연하고 차가운 조작 이상의 진정한 개인적 유대가 생길 수는 없었다. 이 그림은 놀랄 만큼 집요하게 이어져 왔다. 최근의 처칠 전기에서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는 외교관으로서의 스탈린을 기계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처칠의 개인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했다. 소련 기록 보관소가 부분적으로 개방된 이후 축적된 연구는, 이데올로기가 스탈린 세계관의 토대였지만 그가 스스로 '힘의 상관관계(correlation of forces)'라 부른 것에 대한 잘 발달된 감각 또한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국제 관계에서 그 권력은 더 조건부였고 능동적인 외교 노력과 유연성을 필요로 했다. 이는 극단적 기회주의자라는 스탈린의 전통적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오랫동안 스탈린의 처칠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연구하는 데 주된 자료가 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는 2차·3차적 증언 소수에 불과했다.
실망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의 스탈린 회담 회고록이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 스탈린이 처칠에 대해 남긴 말에 대한 그의 기록은 최종 판단의 기준처럼 여겨졌다. "처칠은 당신 주머니에서 마지막 코펙까지 털어갈 사람"이라는 명언이 그것이다.
질라스는 스탈린이 처칠을 위험한 부르주아 정치가로 여겼다고 믿었다. 그러나 질라스는 결코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며, 현재 이용 가능한 자료는 추가 협력에 대한 소망이라는 맥락 속에서 스탈린이 처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해 더 풍부하고 다양한 그림을 보여준다. 감정과 차가운 계산이 뚜렷하게 섞인 그림이다.
위험한 부르주아 정치가
질라스는 처칠-스탈린 관계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세계관, 소련 국가의 이해와 필요에 대한 변화하는 감각, 그리고 처칠에 대한 자신만의 이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봤다. 이러한 이해에는 분명히 '위험한 부르주아 정치가'로서의 처칠 이미지가 영향을 미쳤으며, 소련에 대한 처칠의 구체적 태도와 독일의 미래, 영국의 군사 작전 참여 같은 주요 전쟁 현안에 대한 해석도 함께 작용했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편견뿐 아니라 주재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Ivan Mayski) 같은 출처에서 얻은 정보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마이스키는 개인적 접촉과 광범위하고 때로는 지극히 솔직한 서신 왕래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신을 정성껏 다듬은 치밀함은 분명히 스탈린이 처칠을 설득이나 죄책감·감사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즉 '형성'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겼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처칠의 군인적 본능을 이용해 그를 공세적 행동으로 몰아붙이려 했다. 그것은 영국의 국력과 인적 자원을 아껴야 한다는 정치적 본능과 충돌하는 행보였다.
결국 감정과 그것을 조작하려는 시도야말로, 개인 접촉과 서신이라는 두 형태 모두에서 처칠-스탈린 관계의 핵심을 이루었다. 서로를 인식하는 방식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규정했고, 그 안에서 각자 자신만의 현실 그림을 만들고 서신에 쓰일 용어를 설계하며 우위를 확보하려 애썼다.
그 결과는 두 지도자의 관계 분석에서 핵심 변수로 다뤄지곤 하는 근본적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춘 피상적인 접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