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대통령을 죽이겠다: 북한 특공대의 가장 대담한 작전, 청와대 습격 사건

31명의 특공대원, 목숨을 건 잠입

1968년 1월 18일, 무장 공작원 31명이 평양을 출발했습니다. 사흘 뒤 이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제26보병사단 군복을 입고 미제 무기와 위조 서류를 소지한 이들은 새로 설치된 철책에 구멍을 뚫고 남측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몰랐습니다. 임무의 목적 단 하나만 알고 있었으니, 바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었습니다.

이런 작전을 수행할 때는 최소한 가는 길이라도 알아야 마땅합니다. 특공대는 대개 수도에 머무는 대통령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근처에서 만난 벌목꾼 여러 명을 붙잡고, 서울로 가는 길과 검문소 위치에 대해 무려 5시간 동안 취조했습니다. 정체를 묻자 "이 나라를 통일할 부대"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세뇌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벌목꾼들을 풀어주면서, 이 만남에 대해 누설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벌목꾼들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문제는 경찰관들이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형식적으로 순찰 한 개 조를 보냈을 뿐입니다. 그 사이 북한 특공대원들은 이미 수도 서울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진 침투

특공대는 서울의 거리를 지나 청와대에 서서히 다가갔습니다. 마지막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초병에게 서류를 제시했는데, 거기에는 자신들이 대한민국 국군 소속 비밀 특별 방첩부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경위는 그들을 대통령 관저 안으로 들여보냈지만, 어딘가 수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 시간이면 부대 병력들이 막사에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부대의 기밀성 때문인가? 어쨌든 그는 상급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그런 특수 부대가 청와대에 들어올 권한이 있습니까?" 확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애초에 그런 부대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결국 들통나다

진실이 밝혀질 무렵, 특공대는 건물에서 불과 100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상태였습니다. 초병이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전에 첫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대통령 관저 부지는 일전의 전장으로 변했습니다.

기습자들은 흩어져 소규모 그룹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군은 폭파조 한 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붙잡힌 직후 자살했습니다. 이후 며칠간 나머지 자객들을 수색하는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나머지 30명 중 1명은 체포되었고, 1명은 북으로 탈출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26명이 사망하고 6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총격전 도중 버스 한 대가 화선(火線)을 통과하면서 민간인 사상자가 20여 명 발생했습니다. 또한 북으로 도주하던 특공대 저지 과정에서 국경을 경비하던 미군 4명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포된 김신조 중위

한국군에게 붙잡힌 특공대원은 27세의 김신조 소위였는데, 의외로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는 큰 압박 없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획하고 이미 수행한 파괴·교란 공작에 대해 매우 상세히 진술했습니다.

또 자신이 참여한 작전의 세부 내용도 밝혔습니다. 부대가 국경을 넘은 장소를 지목했고, 평양을 출발할 때 받은 명령서의 내용도 공개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졸라라."

김신조는 1970년 4월 10일 구금에서 풀려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새 조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그를 인권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반면 북한 정권은 북에 남아 있던 그의 친족들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제2차 한국 전쟁의 신호였나?

한편 이번 기습 정보가 제2차 한국 전쟁 개시의 신호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북측에는 공수부대와 지상군이 공격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계획에 따르면 해당 부대들은 우선 우체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해야 했습니다. 1968년 1월 22일에는 남측에서 공산주의 봉기가 일어나고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군부대에 대한 첫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준비가 있었을까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지도자에게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특공대 기습 직후 북한 관영 언론이 처음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무장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고 보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1972년 남북 첫 접촉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른바 '청와대 습격'은 좌익 모험가들의 소행이며, 자신도 당 간부들도 계획된 행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대외련락부가 이번 기습의 배후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작전은 김일성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고, 아마 그의 명령으로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1974년 공식적으로 파괴·교란 활동을 인수한 그의 아들 김정일이 이 프로젝트를 음지에서 주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관계에서 가장 팽팽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3년 동안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을 위반한 사건이 무려 1,034건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