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10만 명인가, 아니면 50만 명인가? 동부 전선인가, 서부 전선인가? 독일군이 가장 많은 병력을 잃은 전투는 어디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참극이라 불릴 만한 전투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지금부터 확인해 보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은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중에서도 독일군에게 특히 처참한 희생을 안겨준 전투 다섯 곳을 살펴본다.

크레타 섬의 학살 — '수은 작전'

크레타 섬 공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거대한 전투로 꼽히지는 않지만, 섬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은 전쟁 내내 투입 병력 대비 가장 큰 손실 중 하나를 감수해야 했다. 더구나 이 섬을 점령하기로 한 결정 자체가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몰타 섬이 훨씬 중요한 목표였다. 몰타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물자를 실어 나르는 호송선단의 길목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크레타에는 버너드 프리버그 장군 지휘 아래 3만 5천 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1년 5월 20일 새벽,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이 이끄는 정예 제11항공군단 소속 낙하산 부대 6천 명이 처음으로 섬에 강하했다. 독일군에게 첫 강하는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진지를 성공적으로 사수했고, 두 번째로 강하한 독일 낙하산 부대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착륙 직후와 작전 초기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게다가 영국 함대는 침공 부대 일부를 수송하던 독일-이탈리아 호송선단 하나를 완전히 격파했고, 다음 선단은 회항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프리버그 장군의 지휘상 치명적 실수로 인해 독일군은 섬의 활주로 하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루프트바페(독일 공군)가 하늘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독일군은 증원부대를 투입해 전투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결국 5월 28일, 연합군의 크레타 철수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1941년 촬영된 독일 공수부대 지휘관들 — 베른하르트 람케 대령,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 한스 크로 소좌.

약 1만 3천 명의 병사만이 구출되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에게 이것은 피로스의 승리였다. 공수군단은 작전 참여 병력의 44%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3,700명이 넘는 낙하산 부대원이 전사했고 약 1,3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루프트바페는 무려 35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히틀러는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형태의 공수 작전을 다시 허용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비꼬듯 말했다. "독일의 창끝이 부러졌다."

모스크바 앞에서의 참패 — '태풍 작전'

1941년 8월,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향한 공세를 멈추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10월 2일에야 스몰렌스크 동쪽에 집결한 페도어 폰 보크 원수의 중앙집단군이 소련 수도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도시를 함락해야 했다. 그런데 공격 시작 닷새 만에 첫눈이 내리고 말았다.

독일군의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보병 사단은 전력이 크게 줄어 있었고, 기갑 사단은 전차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10월 20일까지 비아지마와 브랸스크 근교의 포위망에서 무려 67만 3천 명의 붉은 군대 병사가 포로로 잡혔고, 모스크바는 손에 잡히 듯 보였다.

그러나 날씨는 급격히 악화되어 폭우가 쏟아졌다. 제2기갑집단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도로가 순식간에 진창으로 변해 우리 차량들은 느린 속도로, 그리고 과도한 연료를 소모하면서야 겨우 전진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저항도 단단해졌다. 도시 안에서는 실제로 공황이 발생해 10월 16일 정부가 철수했지만, 스탈린은 수도에 남았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스크바 주변에는 대규모로 토사 방벽과 대전차 장애물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11월 15일 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하 20도에 달하는 혹한이 침략자들을 덮쳤고, 시간이 갈수록 추위는 더욱 심해졌다. 베르마흐트는 이러한 사태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방한복은 턱없이 부족했고, 무기와 차량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무려 22만 8천 명의 병사가 동상에 걸렸다. 12월 5일 소련군의 반격까지 더해지면서 독일군의 공세는 완전히 멈춰 섰다. 독일군의 선두 부대는 모스크바 교외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뿐이며, 정확히는 그 거리조차 기어서 겨우 간 것이었다. 베르마흐트는 완전히 발이 묶였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끔찍했다. 11월 15일부터 12월 4일까지 단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소련 수도 인근 전선에서만 8만 5천 명의 독일군이 전사했다. 이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부터 11월 중순까지 동부 전선 전체에서 발생한 전사자 수와 맞먹는 규모였다. 그리고 손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툴라 지역에서 또 3만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페터 롱게리히가 저술한 전기 『히틀러』에서 언급했듯, 희생자들을 외면한 채 명령을 내렸다. "진지를 사수하고 끝까지 싸워라." 그는 또한 베르마흐트 최고 지휘관 다수를 해임하고 스스로 독일 육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혹한기 공세에 전혀 준비되지 못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교에서 발이 묶였다.

스탈린그라드의 재앙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히틀러의 무능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였다. 그리고 그 잘못의 대가는 평범한 병사들이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1942년 여름, 퓌러는 카프카스 유전지대와 볼가강변의 스탈린그라드를 동시에 정복하려는 환상에 사로잡혀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이것은 순수한 광기였다. 두 공격 목표는 서로 다른 방향에 있고 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 2개 군은 카프카스로, 3개 군은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 히틀러는 지휘관들의 반대에 귀를 닫았다.

공세는 1942년 6월 28일 시작되어 초기에는 성공적이었다. 독일군의 진격에 크게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7월 28일 유명한 명령을 하달했다.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 8월 21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강력한 제6군에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명령했고, 나흘 뒤 그 부대는 도시 북쪽의 볼가강 기슭에 도달했다. 스탈린의 이름을 딴 이 요새 도시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수주 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11월 19일, 소련군이 기습적으로 반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제6군은 포위망에 갇혔고, 28만 4천 명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거대한 포위권 안에 갇히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1942년 9월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 중인 독일 보병.

모스크바 앞에서처럼 혹독한 날씨가 곧 독일군을 덮쳤다. 보급 부족이 나타났다. 붉은 군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소련군의 포병과 공군은 매일 갈수록 좁아지는 포위권 내부의 목표물을 폭격했다. 전차병 에른스트 파제는 이렇게 회고했다.

러시아군은 훨씬 강력한 부대, 특히 보병의 지원을 받는 전차로 우리를 압박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집은 알몸 바람에 드러난 들판뿐이었다. 하루하루 날카롭고 얼음장 같은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눈의 양은 그래도 견딜 만했지만, 눈보라와 거센 바람 속에서는 지옥이 되었다.

마침내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작으로부터 6개월 만에 포위망 안의 독일군이 항복했다. 14만 6천 명의 병사가 전투 중 사망하거나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포위된 동료들에게 보급품을 공중 투하하던 루프트바페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어 비행 및 지상 요원 8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10만 8천 명 중 절반 이상이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이로써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은 끝을 맺었고, 이 순간부터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주도권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붉은 해일 —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1944년 봄, 소련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는 그해 여름 벨로루시 지역의 독일군 격파를 최우선 목표로 결정했다. 작전은 대규모로 준비되었다. 4개 전선군의 동시 공격으로 벨로루시, 서부 우크라이나, 그리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일부를 적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 계획이었다. 총 240만 명의 병사, 3만 6천 문이 넘는 야포와 박격포, 5,200대의 전차, 6,300대의 전투기가 공세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1944년 6월 23일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길이 350km에 달하는 독일군 전선을 돌파했고, 그 달 말까지 서쪽으로 300km를 진격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산하 2개 군이 궤멸되고 1개 군이 포위당하면서 거의 소멸 상태에 빠졌다.

소련군은 잔존한 중앙집단군의 독일군 16개 사단과 맞서 132개 사단과 62개 여단 및 기갑 연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7월 말, 붉은 군대는 북쪽으로는 동프로이센 국경에, 중부 전선에서는 바르샤바 인근에, 남쪽으로는 베오그라드 인근까지 진출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독일군에게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은 보브루이스크 근교에서 파괴된 전차와 전사한 승무원들.

작전이 공식 종료된 8월 29일까지, 소련군은 길이 1,0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최대 600km 깊이까지 적 영토로 진격했다. 독일군에 가해진 이 참화는 절대적이었고, 이 전쟁에서 그와 견줄 만한 사례가 없었다. 제3제국은 전사, 부상, 실종, 포로를 합쳐 40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일부 자료는 손실이 무려 67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한 나치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집단군의 붕괴는 동부 전선에서 조직적인 독일군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었다."

베를린 전투

소련군의 베를린 공격은 1945년 4월 16일 시작되었다. 붉은 군대는 이 전투에 바그라티온 작전 때보다도 더 큰 병력을 투입했다. 250만 명의 병사, 4만 1천 문의 야포와 박격포, 6,200대의 전차, 7,200대의 항공기가 그것이다. 반면 이미 잔존 전력을 쥐어짜낸 독일군은 30만 명에 불과했으며, 그 상당수는 국민돌격대와 히틀러유겐트 출신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히틀러는 이 시점에서 기념비적인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볼셰비키가 독일 땅에 들어왔을 때 독일 민족이 겪게 될 결과물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었다. 그 발췌문은 페터 롱게리히의 최근 저술인 퓌러 전기 『히틀러』에 인용되어 있다.

"노인과 아이들은 살해당하고, 여성과 소녀들은 부대 창녀로 짓밟힐 것이다.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도 썼다. "이번에는 볼셰비키가 아시아의 영원한 운명, 즉 독일 제국 수도의 성문에서 피를 다 빨릴 운명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5선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지나간 후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과 주변 지역의 폐허다.

총통의 예언은 좌절되었다. 적어도 후자의 경우에는 말이다. 처참한 시가전 속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베를린의 거리를 미터 단위로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도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는 동쪽과 서쪽에서 연합군이 퍼부은 대규모 포격과 폭격의 결과였다. 나치의 유력 인사들은 목숨만이라도 건지려 애썼지만, 히틀러는 끝까지 남았다. 5월 2일, 베를린은 항복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엄청났다. 전사, 실종, 부상, 포로를 합쳐 최대 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베를린 민간인 희생자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