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나는 울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 독일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한 청년의 충격적인 생존 증언

21세의 여름, 바르샤바 봉기 전야

21살이면 미래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평하게 살며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헨리크 트로슈친스키(Henryk Troszczyński)에게 인생의 그 순간은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44년 여름, 바르샤바가 봉기를 준비하던 시절, 그가 걱정했던 것은 탄약과 소총, 수류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W시'가 도래했다. 울스카(Wolska) 22번지 출신 소년들, 그리고 그중 한 명이었던 헨리크가 속한 17명 규모의 분대가 보유한 무기라곤 기관단총 4정과 소총 2정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카롤코바 거리 교회의 종소리가 오후 5시에 울려 퍼지자, 그들은 백적색 완장을 팔에 두르고 거리로 나섰다. 다른 봉기군 분대와 마주칠 때마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마치 방금 도시 전체를 해방한 듯한 기분에 젖었다.

성 라자루스 병원의 학살

봉기 개시 이틀 후인 1944년 8월 3일, 분대에는 단 4명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다른 부대로 흩어졌거나 승리를 믿지 못해 집에 숨어 버렸다. 헨리크는 친구 스타셰크(Staśek)와 함께 대대에 합류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향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독일군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의 비를 그대로 맞았다. 예지 A. 브와즈워(Jerzy A. Wlazło)는 저서 『카틴에서 온 소년(Chłopak z Katynia)』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셋씩 나란히 날아왔다. 차례로 목표물 상공에 진입해 선회했다. 첫 번째가 급강하해 폭탄을 투하한 뒤 대열 맨 뒤로 복귀하면, 이어 두 번째, 세 번째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계속됐다. 목표물은 바로 바리케이드였다…"

 나는 울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 독일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한 청년의 충격적인 생존 증언

바르샤바에 투입된 디를레방거 부대의 병사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8월 5일, 헨리크는 성 라자루스 병원 인근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때 디를레방거(Dirlewanger) 돌격대가 병원 안으로 쇄입했다. 근처 덤불에 숨어 있던 헨리크는 학살이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 안의 모든 이들이 살해당했다. 환자, 부상자, 의료진, 그리고 그곳에 피신했던 울라 주민들까지 예외는 없었다.

병원에는 독일군 부상자들도 입원해 있었다. 그들의 개입 덕분에 겨우 의료진 50명만이 목숨을 건져 성 스타니스와우스로 옮겨질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독일군은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병원을 떠나며 그들은 건물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트로슈친스키는 훗날 나치 범죄 조사 위원회에서 증언할 때 이렇게 회상했다.

"건물에 불이 붙은 뒤, 나는 많은 환자와 부상자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불타는 건물의 창문으로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독일군 병사들이 발포하는 장면을 내가 직접 목격했다. 그 총격으로 사람들은 살해당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수십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병원에는 주로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내 생각에 독일군이 불을 질른 그 건물 하나에만 약 1,000명의 부상자와 환자가 있었다."

 나는 울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 독일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한 청년의 충격적인 생존 증언

기적처럼 스쳐 간 죽음

다음 날, 헨리크는 울스카 22번지 지하실에서 함께 숨어 지내던 민간인들과 함께 붙잡혔다. 포로들은 이미 시체 더미가 쌓여 있는 담벼락 앞으로 몰렸다. 새 포로들은 그 시체 더미를 넘어서야 담벼락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트로슈친스키는 자신의 책에서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은 울었고, 어떤 이는 기도했으며, 또 어떤 이는 팔로 담벼락에 매달린 채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절박하게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또 누군가는 '하느님, 폴란드를 구하소서'를 노래하듯 읊조리려 했다." (...) "두 번째 일제 사격이 '찌익, 찌익, 찌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우리 발밑의 땅을 찢었다. 하지만 이내 총알이 사람들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가슴에서 피를 토하더니 무서운 신음 소리와 함께 축 늘어졌다. '아빠! 아빠!' 뒤쪽에서 누군가 울부짖었다."

 나는 울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 독일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한 청년의 충격적인 생존 증언

울라에서 학살된 민간인들. 헨리크 트로슈친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 전체가 바로 이런 풍경이었다고 한다.

헨리크가 살아남은 것은 오직 처형을 집행한 병사들이 완전히 만취해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귀중한 몇 초의 시간 벌기가 그의 목숨을 구했다. 곧 대전차 참호를 메울 포로를 찾던 헌병이 도착했고, 그는 그 틈을 타 처형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헌병들은 포로들을 지아우도프스카 거리 인근의 마당들로 흩어 보냈다. 울스카 26번지에서처럼 그곳마다 시체 더미가 쌓여 있었다. 전방에서 대기하던 전차들이 시내로 진입할 수 있도록, 그 참호를 시체로 메꾸려던 것이다. 시체 위로 전차가 지나가게 하려고."

이후 며칠 동안 마당과 담벼락 아래에는 시체만 더 쌓여 갔다. 그는 민간인들에게 봉기군 방어선을 향해 달려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간 동안 독일군에게 붙잡힌 바르샤바의 생존자들은 시신을 운반하고 태우는 짓에 동원되었다. "그 수가 수만에 달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헨리크와 다른 포로들은 독일군 진지 바로 앞에 줄지어 세워졌다. 나치는 봉기군이 자국민에게 발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산 인간 방패 너머에는 중기관총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폴란드인들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쏜 첫 일제 사격에서 사수는 총을 제어하지 못해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트로슈친스키는 곁에 있던 남자가 무릎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등에 총탄을 맞은 것이었다.

 나는 울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 독일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한 청년의 충격적인 생존 증언

봉기 초 며칠간 울라의 한 거리에서 방어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또 한 번 실패한 사격 후, 사수는 총구를 헨리크의 등으로 겨눴다. 그는 오직 기적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총성을 기다리는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독일군의 머리는 개머리판에 고요히 얹힌 채 미동도 없었고, 이마의 총탄 구멍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헨리크는 봉기의 끝을 지켜보지 못했다.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열차에 실려 프루슈쿠프로 이송되었고, 이후 KL 그로스로젠 수용소의 부속 수용소인 AL 나므스와우로 끌려갔다.

출처

  • Jerzy A. Wlazło, Chłopak z Katynia(카틴에서 온 소년), Agora,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