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연합 공화국 시절, 해상 전쟁과 같은 중요한 국가 과업은 자본가 '기업가'들에게 외주로 맡겨졌습니다. 이러한 상업적 전쟁은 황금기 동안 공화국의 강력한 힘의 원천이었지만, 결국 단기 이익에만 집중한 나머지 공화국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역사학자 페페이 브란동(Pepijn Brandon)이 박사 학위 논문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던 공화국
1588년 스페인 국왕과의 투쟁 과정에서 탄생한 네덜란드 7개 연합 공화국은 사실 엄밀한 의미의 통일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공화국을 구성한 7개 주는 여러 분야에서 동맹국이라기보다 경쟁자에 가까웠으며, 스페인과의 싸움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만 협력했습니다.
공화국에는 공식적인 수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각 주의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헤이그에 모여 회의를 열었고, 1648년까지 이어진 스페인과의 전쟁에 관한 결정도 이곳에서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실행과 국제 무역로의 확장 및 감시는 무역상들 자신의 몫이었습니다.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WIC(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같은 무역 회사들은 국가 총회의 간섭 없이 세계의 바다에서 자체적인 무역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함 건조, 공화국 해역의 경비, 통행료 징수는 5개 해군성이 담당했는데, 여기에서도 민간 기업가들이 상당 부분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해상 전쟁은 주로 상업적 이익을 겨냥했습니다. 국가가 경제 엘리트들과 긴밀하게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 수행과 조선은 매우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공화국은 17세기에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단기적 사고의 함정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 18세기 공화국이 정체되고 서서히 무너져 내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느슨한 구조로는 당시 진정한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랑스와 영국 같은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관료 국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논문 『전쟁의 주인들: 네덜란드 축적 순환 속의 국가, 자본, 군사 기업(1600–1795)』(Masters of War. State, capital, and military enterprise in the Dutch cycle of accumulation, 1600–1795)으로 최우수 성적(cum laude)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페페이 브란동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결국 상실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 쇠퇴나 국가의 비효율 때문이 아니었다"며 "상업과 국가가 얽히면서 잘못된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브란동에 따르면 '중개(brokerage)' 체계, 즉 전쟁 임무의 상업적 외주 위탁은 18세기에도 지속되었고, 많은 조선소에서는 오히려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습니다. 귀족 세력의 부상과 함께 구직자들이 곳곳에 나타나 한때 성공적이었던 네덜란드의 장인 정신이 사라졌다는 통념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프랑스와 영국조차 이 네덜란드식 성공 모델을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상업과 국가의 얽힘 때문에 공화국은 무역로 보호를 위한 소형 고속 전함에 투자하기로 선택합니다. 브란동은 "상업 엘리트들이 국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상업적 이윤 창출이라는 단기적 이익이 선택되었다"며 "해상에서 지속적인 패권을 확보할 수 있는 강력한 함대 건설과 같은 장기적 이해는 외면당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기업가들이 연방 방식으로 조직된 중개 협약을 통해 정치를 매우 직접적으로 통제하던 네덜란드 국가의 특수한 구조는, 훨씬 더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던 영국 같은 국가와의 경쟁에 뛰어드는 데 중요한 장애물이 되었다"고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