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아우슈비츠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 나치의 '최종 해결'은 어떻게 탄생했나

1930년대 내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나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습니다. 홀로코스트로 알려지게 된 끔찍한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곧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굽이길이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럽 인종 재편' 꿈

아돌프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는 소위 '유럽의 인종적 재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세계관에서 게르만 민족은 최상위 인종이었고, 그 밖의 모든 인종—특히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운터멘셴(Untermenschen, 하등인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히틀러의 꿈은 베르사유 조약 이후 해외에 남겨진 독일계 민족들을 포함해 모든 독일계 사람들을 하나의 새롭고 위대한 독일 제국으로 통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 안에 열등한 인종을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폴란드 병합

1939년 히틀러는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정복했습니다. 국토는 둘로 분할되었고, 서폴란드의 상당 부분은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도시와 마을에는 새로운 독일식 이름이 붙었고,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오직 '제한적인 초등 교육'만 허용되었습니다. 하인리히 힘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학교의 유일한 목적은 500까지의 간단한 산술,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능력, 그리고 독일인에게 복종하며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글을 읽는 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에 살던 유대인 약 35만 명과 '독일화될 수 없는' 다수의 폴란드계 주민들은 즉결 처형되거나 총독부(Generalgouvernement)로 추방되었습니다. 총독부란 나치가 폴란드 남동부에 설립한 광대한 지역으로, 운터멘셴을 수용하기 위한 일종의 예비지, 즉 버리는 땅으로 계획된 곳이었습니다.

제국 내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도 독일계 독일인들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추방되었습니다. 루블린, 크라쿠프, 바르샤바 같은 폴란드 도시들에서는 곧 과밀화된 게토—완전히 밀봉된 유대인 거주구—가 생겨났고, 그곳에서는 영양실조와 전염병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리적 절멸: '비독일적이며 불가능하다'

1940년 5월 히틀러의 총독부 대표 한스 프랑크가 새로운 유대인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힌 뒤, 폴란드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임시 게토와 강제수용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곳의 조건은 문자 그대로 살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유대인 문제'는 해결책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힘러는 이 무렵 모든 유대인을 아프리카 식민지, 가능하면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1940년 여름 진지하게 검토되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 10월 나치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잃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다가스카르 계획도 보류되었습니다. 어차피 그 계획은 독일의 해양 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힘러는 집단학살의 가능성에 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남깁니다. "각 개별 사건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러시아식의 육체적 파괴 방법을 비독일적이고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방법이 여전히 최선이다."

1941년 7월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유대인 문제의 영토적 해결'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광대한 영토가 빠르게 정복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특히 강제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우랄산맥 너머 어딘가로 추방될 수 있으리라 여겨졌습니다.

무자비한 특수작전부대(Einsatzgruppen)

그러나 이 침공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변혁의 시작임이 곧 드러났습니다. 이 공격은 문자 그대로 파괴 전쟁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전선 후방에는 소위 특수작전부대(Einsatzgruppen)가 배치되었습니다. 기동화된 학살 부대였던 이들은 독일군의 공세가 러시아의 혹한 앞에 멈춰 선 뒤에도 정복 지역에서 무자비한 참혹을 저질렀습니다.

키예프 근교에서는 30,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이틀에 걸쳐 끔찍하게 학살당했습니다. 한 무리는 옷을 벗고 바비야르 협곡 바닥에 눕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명씩 총살되었습니다. 새로운 무리가 협곡으로 내려가 시신 위에 몸을 눕혔고, 똑같은 운명이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특수작전부대들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미리 조직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안 커쇼(Ian Kershaw)의 연구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이드리히와 그의 상사 힘러는 특수작전부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몇 주가 지난 후에야 요청했습니다.

디젤 엔진

특수작전부대의 잔혹한 학살은 유대인 문제와 과밀해진 폴란드 게토의 해결책이 점차 집단학살 방향으로 모색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 전역의 유대인들이 폴란드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즉 확실한 죽음을 향해 이송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총살 집행은 처형자들에게 막대한 심리적 부담을 안겼습니다. 그래서 더 효율적이고 덜 괴로운 절멸 방법이 신속히 모색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길고 값비싼 수송 없이 말입니다.

세르비아와 총독부 등지에서는 이미 가스 트럭 실험이 진행된 바 있었습니다. 포로들을 트럭 짐칸에 가둔 뒤 '안락사 보조원'이 디젤 엔진을 시동하고 배기가스를 차 안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우치(Łódź)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오래된 성 첼름노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이런 방식으로 가스 살해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는 처음으로 치클론-B 독가스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방식은 값싸고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지하 가스실에서는 가스 트럭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스 트럭을 운영하던 병사들은 흔히 희생자들의 공포에 찬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매우 가혹한 경험으로 여겨졌습니다.

'최종 해결'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몇몇 나치 지도자들이 베를린 교외의 반제(Wannsee) 빌라에 모였습니다. 참석자들은 가스를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 회의는 흔히 홀로코스트의 출발 신호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체계적인 가스 살해가 이미 시작된 상태에서 진행된 일종의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3월 최초의 절멸수용소 베우제츠(Bełżec)가 가동되었습니다. 같은 해 늦게 총독부 내에 위치한 또 다른 절멸수용소들인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가 뒤따랐습니다. 이미 존재하던 강제수용소 마이다네크는 여러 개의 가스실로 확장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인근에는 러시아인 포로들에 의해 거대한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가 건설되었습니다.

과밀해진 게토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가스 살해된 뒤에는 유럽 전역에서 온 유대인 수송열차가 뒤따랐습니다. 대부분의 수용소는 1943년에 폐쇄되었고 학살의 흔적 대부분은 세심하게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만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당수가 유대인이었지만 롬인(집시), 전쟁포로, 정치범들도 그곳으로 끌려갔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대인 문제의 해결'은 '동쪽으로의 추방'에서 모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942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분명해졌습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독일의 절멸수용소에서는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으며, 그중 약 600만 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