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이 다시 한창이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어려운 문제, 그중에서도 역사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5월 21일 월요일에는 VWO(예비학술교육) 과정 학생들의 차례다. 이들의 학습 범위 가운데 특히 까다로운 주제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 시기의 '휴전 논쟁(Bestandstwisten)'이다.
주변 유럽 국가들이 절대 군주의 통치 아래 있던 시절, 네덜란드 지역들은 국가 원수 없이 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네덜란드인들이 왕과 귀족과는 인연을 끊고 '자유, 평등, 박애'를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 구호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무렵의 일이다.
총독(스타트홀더)의 권력
네덜란드에서 스타트홀더(stadtholder, 총독)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중요한 관직은 중앙 정부인 주의회(States General)에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군대의 최고 사령관 역할도 수행했다. 스타트홀더는 당대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 즉 오라녜 가문 출신이었으며,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왕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1672년부터 1702년 사망할 때까지 총독직을 수행한 윌리엄 3세는 막대한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는 각 주로 하여금 총독직을 세습직으로 선포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분명 왕정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물론 잉글랜드 왕녀의 아들이자 잉글랜드 국왕이기도 했던 그에게 왕적인 기질이 있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반면 오라녜 공 빌럼의 아들 마우리츠는 훨씬 덜 왕적으로 행동했다. 1584년 아버지가 암살된 뒤 총독직이 그에게 제안되었을 때, 공화국은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다. 왕 노릇을 할 만한 때가 아니었고, 설령 그렇게 했다면 다른 총독들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총독이 겸손한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 곧 권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우리츠는 바로 '휴전 논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뚜렷이 증명한다.
내전 직전까지?
휴전 논쟁은 신학자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Gomarus)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Arminius) 사이의 견해 차이로 시작되었지만, 홀란트 주 대평의원(Grand Pensionary)이자 국무회의 서기를 지낸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 등 정치인들의 개입으로 거의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당시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모두 전쟁에 지쳐 있었고 재정도 파탄 직전이었다. 공화국 최고의 정치 실력자였던 올덴바르네펠트는 1609년부터 1621년까지 이어지는 휴전, 이른바 '십이년 휴전'을 성사시켰다. 공화국은 이 기간 동안 경제적·군사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해상 무역이 크게 번성하면서 네덜란드는 순조로운 시기를 맞았다.
그동안 신학자들은 다른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라이덴 대학교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칼뱅주의의 핵심 교리인 '예정론'을 두고 견해 대립이 일어난 것이다. 고마루스는 보수적 교리를 고수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진정한 신자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며, 덕스러운 삶을 산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신자들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선택받았기 때문에 덕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이에 반대했다. 그에 따르면 신앙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셨는지 여부가 드러난다. 즉,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은 신앙의 결과이며 하나님이 미리 내려주신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견해 차이는 처음에는 강의실 안에서만 벌어졌다. 학생들이 두 신학자 중 한쪽 편에 섰고, 졸업해 강단에 서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견해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민중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르미니우스를, 아버지는 고마루스를 따르며 가족들이 다투었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라이덴에서는 아르미니우스파 시 관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청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기까지 했다.
고마루스파는 이 새로운 운동과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와 강단에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르미니우스파 지지자들은 1610년 홀란트 주 의회에 '항변서(Remonstrantie)', 즉 항의문을 제출했고, 이후 '항변파(레몬스트란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집정관들은 분열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린 교회를 원했다. 그래서 항변서에 대해 양측이 하나의 문만 통과하도록 답변했다. 보수파든 항변파든 같은 강단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서로의 설교를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파만으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성찬식 때 자신들이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이단 교리 추종자들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보수파는 '대항변서'를 제출했고, 이로써 '대항변파(반레몬스트란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주 의회는 기존 결정을 고수했다. 이에 대항변파는 더 이상 '죄인들'과 함께 있지 않기로 결심했고, 결국 두려워하던 분열이 현실이 되었다. 목사들은 더 보수적인 교회로 옮겨 가거나 헛간과 창고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마우리츠, 군대를 동원하다
목사들이 주 의회의 올바른 교리에 관한 결정을 공공연히 무시하게 되자, 올덴바르네펠트는 힘으로 이들을 통제하려 했다. 1617년 8월, 홀란트 주 의회는 도시들이 소요 사태를 진압할 자체 병력, 이른바 '워르겔더르스(waargelders)'를 모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올덴바르네펠트가 마련한 이 조치는 '엄정 결의(Scherpe Resolutie)'라고 불렸다. 그 결과 마우리츠가 지휘하던 도시 주둔군은 도시 행정관들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마우리츠는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진짜 권력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냈다. 대항변파의 예배에 위엄 있게 앉아 참석하며 공개적으로 그들 편에 섰고, 어디서든 올덴바르네펠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올덴바르네펠트가 병사들을 이용해 진정한 종교를 탄압한 뒤 스페인을 다시 들일 음모를 꾀하는 반역자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마우리츠의 최대 무기는 역시 군대였다. 그의 병사들은 그에게 무조건 복종했고 행정관들의 명령은 듣지 않았다. 군대의 지원을 받은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마우리츠는 올덴바르네펠트의 지지자들을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고, 대신 자신의 지지자들이 행정 요직에 앉았다. 결정적으로, 마우리츠는 주의회로부터 올덴바르네펠트 체포 명령까지 받아내는 데 이른다.
도르트 총회
올덴바르네펠트가 감옥에 있는 동안, 1618년 도르드레흐트(Dordrecht)에서 국가 총회가 열렸다. 이 종교 회의는 주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개최될 수 있었는데, 이후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 중 누가 옳은지, 그리고 어떤 교리가 올바른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했다. 예상대로 항변파는 옳지 않은 것으로 판정받았다. 대항변파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은 상대 진영을 단죄했다. 이는 초기에는 박해로 이어졌지만, 약 10년 후에는 두 운동이 비교적 조화롭게 공존하게 된다.
그사이 시간은 1619년으로 넘어가 있었다. 올덴바르네펠트는 자신의 결백을 확신했지만, 특별히 구성된 법정에서 7개월간의 재판 끝에 국가에 대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71세의 정치가는 헤이그 빈넨호프(Binnenhof)에서 처형당했다. 마우리츠는 자신의 길을 밀고 나아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적수만 잃은 것이 아니라 경험 많은 조언자마저 잃었다. 그리고 훗날 그가 전직 정부 수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면서 수많은 골칫거리에 시달리게 된다. 마우리츠는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전략적 정치가였던 판 올덴바르네펠트 앞에서는 한 수 아래임을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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