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플라케 전투(Bataille de Malplaquet)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이던 1709년 9월 11일, 프랑스 북부 아벤쉬르엘프(Avesnes-sur-Helpe) 근처의 작은 마을 말플라케에서 벌어진 대규모 회전입니다. 루이 14세가 네덜란드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드 빌라르 원수는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 연합주로 구성된 대동맹군, 즉 외젠 드 사보이아 왕자와 말버러 공작이 지휘하는 군대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말버러 공작이 '피에 굶주린 전투'라고 표현할 만큼 처절했던 이 회전에서, 영국-제국 연합군의 공세 속에 부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지만 빌라르는 군대를 질서 있게 철수시키며 공격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겼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시작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Philippe d'Anjou)는 1700년 11월, 필리프 5세로서 스페인 왕위에 올랐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1701년 영국·네덜란드 연합주·신성로마제국·프로이센·사보이아가 참여한 '헤이그 대동맹'이 결성되면서 프랑스와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전황은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다, 1708년 12월 드 부플레르 원수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릴에서 최후의 패배를 기록합니다. 여기에 1708~1709년의 혹독한 겨울로 농작물이 전멸하면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왕으로서는 당연히 평화를 모색해야 했지만, 스스로 그 길을 택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루이 14세는 1709년 6월, 드 빌라르 원수에게 군대 재건을 명령합니다.
말플라케 숲에서
1709년 6월 23일, 드 빌라르 원수는 셸트 강(Scheldt) 방면에 도달했습니다. 동맹군은 7월 투르네를 점령한 뒤 동진하여 몽스와 발렌시엔을 포위합니다. 이에 드 빌라르 원수와 드 부플레르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 7만~7만 5천 명, 대포 80문의 프랑스군은, 말버러 공작과 신성로마제국에 복무하는 외젠 왕자가 이끄는 병력 10만~11만 명, 대포 100~120문의 연합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전력은 명백히 불균형했습니다.
전장은 두 계곡 사이의 고원지대였습니다. 프랑스 진지 양쪽에는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한쪽은 울창하고 다른 한쪽은 거의 훤히 내다보이는 상태였습니다. 말플라케 간격(Gap of Malplaquet)은 폭 1,500m에 달했고, 티에리 숲(Bois Thierry)에 의해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빌라르는 두 숲을 등지고 초승달 모양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중앙을 살짝 후방에 두었으며, 참호를 파고 지형을 활용해 진지를 보강했습니다. 『말버러 공작의 역사』에는 "아바티스(가시 장애물)가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포가 배치된 가운데 아군 병사들은 땅속에 파묻힌 적과 싸워야 했으니, 마치 '두더지와의 전쟁'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진지 앞에서 외젠 왕자 휘하 장군들은 공격을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그들을 독려합니다. "우리 눈앞의 적은 그토록 여러 번 패배시킨 적보다 약하다."
1709년 9월 11일 새벽, 기병은 말에 올랐고 보병은 무기를 들었습니다. 오전 7시 30분부터 천둥 같은 포성이 울려 퍼졌고, 오전 8시 프랑스군이 공격을 받으면서 국왕 직속 연대가 무너져 도주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나쁜 출발이었습니다. 좌익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서도 전선을 누비며 공격을 독려하는 외젠 왕자가 보낸 연합군에 쫓겨 숲속으로 밀려납니다. 빌라르는 중앙 여러 연대를 차출해 무너지던 좌익을 재편성하고, 적 보병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익의 부플레르는 스위스 대대 8개와 용기병 연대 3개를 이끌고 네덜란드 대대 30개와 맞설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좌익 지원을 위해 빌라르에게 소집됩니다! 왕립 보병 연대의 총검 돌격으로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중앙이 텅 비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정오가 다가오자 외젠 왕자와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진지의 중앙으로 진격합니다. 연합군 역시 극심한 시련을 겪으며 2만 1천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습니다. 부플레르는 우익을 사수했고, 빌라르는 압도적인 적군 앞에서 좌익 방면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의 말이 부상을 입었고, 원수 본인도 무릎에 총탄을 맞아 탄환을 제거하던 중 의식을 잃고 전장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그사이 잔류 동맹군이 비틀거리며 중앙으로 진격했고, 프랑스군은 '왕의 근위대(Maison du Roi)'의 지원을 받아 만회하려 했습니다. 부플레르는 좌익과 우익, 그리고 이미 무너진 중앙까지 지휘해야 했고, 때로는 어느 대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철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이겼고 누가 졌을까요? '전장을 떠난 자가 패배한다'는 것이 통례입니다. 하지만 승자마저 지쳐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면 어떨까요?
말플라케 전투의 결과
위대한 지휘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외젠 왕자는 머리에, 드 빌라르 원수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말버러 공작은 행방불명되어 전사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노래 〈Marlbrough s'en va-t-en guerre〉("말버러 공작은 전쟁으로 떠나간다", 미롱통, 미론테인...)가 탄생했습니다." .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 이 회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1만 2천 명의 병사를 잃었고, 연합군의 손실은 2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럼에도 연합군은 뜻대로 프랑스 본토를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는 붕괴를 피하고 유리한 고지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앙드레 코르비지에, 『말플라케 전투(1709)』, 이코노미카(Economica), 2013.
- 자크 가르니에, 『프랑스 역사 속 전쟁과 전투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