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라는 이름만 들어도 불길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이 그려온 괴물이 진짜 네로였을까? 아니면 로마를 불태우지도 않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도 않았던 역사의 희생자였을까?
서기 64년 7월 19일,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의 주민들은 코끝을 찌르는 연기 냄새를 맡았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누가 도시에 불을 질렀는가? 황제를 미워한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지목했고,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한 일부 역사가들은 들통나지 않을 만큼 의심의 여지를 남기며 기울어진 서술을 남겼다.
역사는 네로를 '악랄하고, 무모하며, 낭비벽이 있고, 변덕스럽고, 파렴치한 방화광'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 중 상당수는 공정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다 온건한 시각을 지닌 학자들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정적들의 음모에 희생된 황제
냉철한 학자들은 필헬레니즘(친그리스) 성향의 박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던 네로가 역사상 가장 더러운 음모의 희생자라고 결론짓는다. 같은 학자들 상당수는 오히려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다. 주목할 점은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같은 기독교의 핵심 변증가들이, 기독교인에 대한 첫 번째 대박해로 이어진 로마 대화재라는 중대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자신들의 역사서에서 네로에 대해 좋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부정적 태도를 최소한 의심스럽게 만든다. 실제로 네로는 많은 선정을 폈고, 그의 결정 다수는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네로를 단지 충동적이고 타락한 인물로 여겼을 뿐, 후대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편집광적이고 잔혹한 폭군으로 보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로마의 화재가 진화된 후 네로가 자신의 웅장한 궁전 건설에만 몰두하지 않고 도시 전체 재건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그는 폐허를 정리하고 새롭고 더 넓은 거리를 개설했으며, 종전의 목조 주택 대신 벽돌로 지은 현대적인 주택을 세웠다.
'황제는 로마가 불타는 동안 리라를 연주했다'는 유명한 일화에 대해, 네로의 반대파였던 타키투스조차 그 이야기에는 리라가 등장하지 않으며,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하궁에서 네로가 트로이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노래하며 로마를 애도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결국 타키투스는 리라 일화를 신화로 규정하고 배척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지도 않았다
역사 재해석과 고정관념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오늘날, 인터넷과 가짜뉴스의 시대에 네로가 기독교인에 대한 첫 번째 박해의 주도자이자 창시자였다는 정설마저 심각하게 재검토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교수 브렌트 쇼(Brent Shaw)는 이 사건이 타키투스와 주로 기독교 전통에 의해 퍼졌으며, 황제가 실제로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자신의 정원에서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는 주장 또한 극히 의심스럽다고 지적한다.
초기 기독교 작가 중 한 명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보호를 받았던 락탄티우스는 당대 다른 기독교 역사가들과 입장을 달리하여, 네로에게 방화를 '지휘'했다거나 그것이 기독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고 돌리지 않았다.
백성은 그를 애도했다, 통치자가 아니라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의 죽음을 백성들이 축하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아마도 완전히 사실이 아니다. 귀족과 원로원은 네로가 권력에서 물러난 것을 기뻐했지만, 일반 백성과 노예들은 진심으로 그를 애도했으며, 이는 타키투스와 다른 로마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게다가 이후 두 황제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 비텔리우스는 민심을 얻기 위해 네로의 추억을 내세웠다. 네로는 예술의 후원자이자 뛰어난 음악 작곡가였으며, 그리스와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인물이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수년간 사람들이 봄과 여름마다 네로의 무덤에 꽃을 장식했다고 기록했다. 온 백성이 네로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역사라는 영역 어딘가에 분명 썩은 것이 있는 셈이다.
만약 네로가 민중을 착취한 지도자였다면, 그의 무덤 위에는 잡초만 무성했을 것이고 그의 통치로 고통받은 이들의 끝없는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네로는 사후에도 로마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허위로 매도당했을 뿐이다.
신뢰까지 태워버린 대화재
이 화재는 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서기 64년 7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 로마 한복판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 상점들에서 불이 붙었다. 발화점은 팔라티노 언덕과 카일리우스 언덕에 인접한 대경기장 방면, 카페나 문 일대였다. 이 지역에는 가연성 물질로 가득 찬 상점들이 많았고, 여기에 강풍이 겹치면서 불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대혼란 속에서 조직된 집단이 새로운 발화점을 만들며 불을 부추겼다는 기록도 있고, 어떤 이들은 버려진 집에 들어가 약탈에 가담하기도 했다.
화재는 폐허만 남겼다.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 베스탑 처녀들의 관저, 그리고 제국 궁전의 상당 부분인 도무스 트란지토리아(수에토니우스는 이를 '두 언덕 사이에 걸쳐 있는 궁전'이라 묘사했다)가 소실되었다! 피해는 참담했다. '영원한 도시' 로마는 6일 동안 불길의 손아귀에 놓였다. 사망자는 12,000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며, 4,000채의 소규모 주택과 132채의 저택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네로의 덕망에 대한 평판도 긴 세월의 저편으로 불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