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코 메트로 S.A.(Attiko Metro S.A.)는 에반젤리스모스(Evangelismos)역과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Agios Dimitrios)역의 이름을 각각 파블로스 바코얀니스(Pavlos Bakoyiannis)역과 알레코스 파나굴리스(Alekos Panagoulis)역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파블로스 바코얀니스 암살 30주기를 맞아 이루어진 조치였습니다.
기존 역명은 2020년 4월 30일까지 역 표지판에 괄호와 함께 병기됩니다. 즉 "파블로스 바코얀니스(에반젤리스모스)", "알레코스 파나굴리스(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형태로 표시되며, 이후에는 새 역명만 사용됩니다.
아래에서 저항의 영웅, 알레코스 파나굴리스를 기억해 봅니다.
저항의 영웅, 알레코스 파나굴리스
1976년 5월 1일. 화창하고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 속에서 그리스 전역에서는 전통적인 명절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ERT 라디오(당시에는 민간 TV 채널이 없었고 ERT TV는 오후에야 방송을 시작했습니다)는 음악 방송을 중단하고 비보를 전했습니다. 바로 알레코스 파나굴리스의 죽음이었습니다. 부리아그메니스 대로를 따라 글리파다 방향으로 고속으로 달리던 그의 차량, 피아트 미라피오리가 순간 진로를 이탈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졌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들의 영웅을 잃은 거의 모든 그리스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양심을 높이 들며 결코 타협하지 않고,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사람이었습니다. 이윽고 그의 죽음이 살해라는 소문이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다음 날 신문들은 파나굴리스 살해 가능성을 1면 기사로 실었습니다.
본래 팽팽했고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던 사회 분위기는 그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파나굴리스는 ESA 파일을 공개할 예정이었고, 이는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아베로프 국방장관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특징적인 점은, 파나굴리스가 군부에 협력한 동료 정치인이자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의 존재 때문에 1974년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중도연합-신세력당을 탈당할 준비까지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기이한 교통사고
사건을 수임했던 검사 디미트리스 제바스(Dimitris Tseva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 방향에서 조사되고 있으며, 범죄 행위 가능성에 대한 넓은 논리적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것은 기괴한 교통사고다. 논리적으로 사고라고 주장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파나굴리스의 차량을 도로 밖으로 밀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세 대의 미확인 차량을 찾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사관들과 유족들은 수많은 의문과 중대한 불만을 제기했지만 끝내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정보들은 어둠 속에 묻혔고, 소문은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알레코스 파나굴리스의 장례식은 5월 5일 거행되었고, 거대한 민주주의 집회로 변모했습니다. 아테네 전역에 울려 퍼진 "그는 살아 있다"는 구호는 이후 도시의 수많은 거리에 새겨지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는 글리파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육군 장교 바실리오스 파나굴리스와 아테나 카카불리스(1908~1991)의 차남이며, 대령 정권의 희생자가 된 게오르기오스 파나굴리스, 훗날 정치인이 된 에프스타티오스 파나굴리스의 형제입니다.
그의 삶
아버지 쪽으로는 일리아 지방 디브리(람페아) 출신이고, 어머니 쪽으로는 레프카다 시브로스 출신입니다. 추축국의 점령으로 인해 파나굴리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레프카다에서 보냈습니다. 이후 아테네 국립공과대학교(NTUA) 기계·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정치 활동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신을 지닌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지역 중도 정치 세력, 즉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중도연합(EK)에 합류했습니다. 특히 당 청년 조직인 중도연합 청년회(ONEK, 이후 그리스 민주청년 EDIN으로 개명)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74년 9월 3일 그 회장직에 올랐습니다.
반독재 투쟁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는 민주주의 회복과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 군사정권(1967~1973)에 대한 투쟁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탈영하고 국민저항 조직을 창설한 뒤, 행동 계획을 세우기 위해 키프로스로 건너갔습니다. 현지에서 폴리카르포스 요르카치스 등 정치인들과 접촉하며 저항 운동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로 돌아온 그는 측근들과 함께 1968년 8월 13일 바르키자 근교에서 독재자 파파도풀로스 암살을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가 석방 후 파나굴리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행위는 독재에 맞선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팔라치는 파나굴리스의 다음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한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폭군을 죽이려 했다."
하루 밤낮에 걸친 연속 고문 끝에 그는 반쯤 죽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고, 이후 군사법원에 회부되어 1968년 11월 17일 국민저항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처형을 위해 에기나로 이송되었지만, 파파도풀로스가 직접 개입해 사면을 요청하면서 처형은 무산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25일, 파나굴리스는 에기나에서 보야티오 군사감옥(S.F.M.)으로 이송되었고, 그의 표현대로 "석벽형"이라 불리는 극한의 고립형에 놓였습니다. 1969년 6월 5일 그곳에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다시 붙잡혀 잠시 구디 캠프로 옮겨졌고, 한 달 후 다시 보야티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파나굴리스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무덤과 같은 독방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시를 쓰는 것이 그의 유일한 출구였습니다. 모든 필기도구가 압수된 상황에서도 그는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피를 잉크로, 감옥이라는 무덤의 벽을 종이 삼아 시를 새겨 내려갔습니다.
일부에 따르면, 파나굴리스는 군부가 제안한 사면마저 거부했습니다.
1973년 8월, 거의 4년 반의 감옥 생활 끝에 파파도풀로스가 정권의 자유화 시도 실패 이후 정치범들을 위한 일반 사면을 단행하면서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저항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로 망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에 몰래 잠입해 저항 조직을 결성하며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삶과 최후
대령 정권이 붕괴된 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는 1974년 11월 17일 총선에서 중도연합-신세력(EK-ND, 오늘날 민주중도연합) 소속으로 제2아테네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군부 독재 정권에 협력한 정치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쉴 새 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당선된 직후, 그는 디미트리스 차소스가 군부 정권과 협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당 지도부와 결별했습니다. 같은 당에 "배신자"와 공존하는 것을 거부한 그는 결국 사임했지만, 무소속 의원으로 그리스 의회에 남았습니다. 그는 비판을 굽히지 않았고, 에반겔로스 아베로프 국방장관과 디미트리스 차소스와 공개적으로 충돌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정치적 압력과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정치 사무실 침입 사건, 낯선 이들이 남긴 협박 메시지 등이 그 예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나굴리스는 1976년 5월 1일 부리아그메니스 대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량은 진행 방향에 수직인 대로의 지하 상점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군부 안전기구 관련 파일, 이른바 ESA 파일 공개를 며칠 앞둔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결코 공개되지 않은 이 파일에는 군부에 협력한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담겨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교통사고가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를 정치 무대에서 제거하고 그가 보유한 증거를 파괴하기 위해 자작극으로 꾸며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오늘날까지 제시된 바 없습니다.
고문 속에서 피어난 시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는 수감 기간 내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고문을 매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자기 통제력, 자기 규율, 신념을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유머 감각은 방패가 되어 그가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견뎌낼 수 있게 했습니다.
많은 이들에 따르면, 보야티오 감옥에서 그는 감방 벽이나 잘게 찢은 종잇조각 위에, 종종 자신의 피를 잉크로 사용해 인생 최고의 시들을 썼습니다. 그의 많은 시들이 소실되었지만, 일부는 여러 방법으로 감옥 밖으로 반출했거나,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훗날 다시 써냈습니다.
1972년, 아직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첫 이탈리아어 시집 『Altri seguiranno: poesie e documenti dal carcere di Boyati』(다른 이들이 따라올 것이다: 보야티 감옥의 시와 문서)가 이탈리아 정치인 페루초 파리(Ferruccio Parri)와 이탈리아의 감독이자 예술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서문과 함께 팔레르모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파나굴리스는 이듬해 비아레조 국제 문학상(Premio Viareggio Internazionale)을 수상했습니다.
석방 후에는 밀란에서 파솔리니의 서문과 함께 두 번째 이탈리아어 시집 『Vi scrivo da un carcere in Grecia』(그리스의 감옥에서 당신들에게)를 출판했습니다. 그에 앞서 『더 페인트(The Paint)』라는 제목의 산문집 등 여러 저작들이 그리스어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