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이 소위 '쥐의 길(Ratline)'을 통해 남미로 도주하며 정의의 심판을 피했습니다. 그들에게 손길을 내민 곳은 다름 아닌 바티칸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종전 후 서독에서 특정한 약 1,300만 명의 전 나치 당원 가운데, 1949년까지 실제로 수감된 사람은 겨우 300명에 불과했습니다. 기소된 대부분도 벌금형, 재산 몰수, 공직 취업 금지 정도의 가벼운 처분에 그쳤습니다. 처벌받아야 할 핵심 인물들은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멩겔레 박사, 아돌프 아이히만,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 소장 프란츠 스탕글, 크라쿠프 게토 설립의 주역이자 갈리치아 지역 총독 오토 벡터 등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일부는 요제프 괴벨스처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 멩겔레처럼 남미에서 평온한 노년을 보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연합국의 추적망을 뿌리치고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바티칸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대탈출
"바티칸이 파시즘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알려져 있었다. 바티칸 내 일부 인물들이 이러한 밀수출 작전, 즉 '쥐의 길'에 직접 관여했다." 젊은 시절 영국 정보국 MI6 요원으로 활동했던 작가 데이비드 콘웰(필명 존 르 카레)의 증언입니다. 그에 따르면 종전 후 최대 1만 명의 나치 잔당이 가톨릭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남미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필립 샌즈가 저서 쥐의 길: 나치 고문관의 도주 이야기에서 묘사했듯, 바티칸은 전직 국가사회주의자들을 포섭하고 신분을 세탁해 해외로 내보내는 데 능숙한 '유용한 동맹'이었습니다. 정해진 매뉴얼도 있었습니다. "그의 서류를 파기하거나 유통에서 제거하거나 가짜로 교체한 뒤, 형식적인 조사만 거쳐 시스템을 통과시킨다." 독일인들은 이를 별도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바로 '페르질샤인(Persilschein)'입니다. 빨래를 하얗게 만든다는 세탁세제 이름에서 따온, 이른바 '세탁 증명서'를 뜻합니다.
샌즈의 책에서 복잡한 말년이 그려지는 오토 벡터 역시 '쥐의 길'을 통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하려 했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에 대한 대량 학살 혐의를 받던 그는 알프스 산속에 숨어 있다가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넘어갔지만, 결국 실패하고 로마에서 미스터리한 상황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많은 동료들은 교회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쥐의 길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의 역사학자 다니엘 스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쥐의 길'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 요소들의 결합이었다. 여러 기관들이 상당히 자발적으로 협력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단계적으로 공인되어 갔다."
그렇다면 탈출 경로는 어떠했을까요? 범죄자들의 90%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경유지'는 남티롤의 메라노, 브릭센 또는 볼차노에 있는 수도원이었습니다. 일부 전 나치들은 그곳에 수년간 숨어 지내며 대양 횡단 여행 자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다음 필수 경유지는 로마였습니다. 로마에서 도주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발급한, 명백히 위조된 신분 확인 문서를 받았습니다.
이 확인서를 근거로 적십자 여권을 발급받는 것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1951년까지 약 12만 건의 여권이 발급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샌즈는 쥐의 길에서 "가장 확실한 도주 방법은 관광 비자, 적십자 여권, 그리고 현금('약 15만 리라')"이라고 적었습니다.
'소위 전범들'
나치들이 정의를 피하도록 열심히 도운 교회 인사들 가운데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이름은 알로이스 훌트(Alois Hudal) 주교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성직자는 신학 박사로 그라츠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23년부터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니마 대학의 학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친나치 성향을 결코 숨기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공개적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를 결합한 철학을 지닌 새로운 독일 제국을 환영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제럴드 슈타이나허(Gerald Steinacher) 교수에 따르면, 훌트 주교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에 이끌린 나치 동조 성향의 독일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훌트의 변호자들이 주장하듯 모두를 구원하느라 급한 나머지 누구를 돕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교는 자신 덕분에 해외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의식적으로 사법 당국의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그 최선의 증거는 바로 그의 육성입니다. 훌트 사후 13년 만에 공개된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연합군의 독일과의 전쟁은 십자군 원정이 아니라 경제적 승리를 다투는 경제 강국들 간의 투쟁에 불과했다. 이른바 이 사업은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민주주의, 인종, 종교의 자유, 기독교적 가치 같은 구호를 사용했다. 이 모든 까닭에 1945년 이후 나는 나의 모든 자선 사업을 주로 전직 국가사회주의자, 파시스트, 그리고 소위 전범들에게 헌신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훌트의 명단
훌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치들을 "볼셰비즘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화답한 이들은 다름 아닌 미국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숨겨진 이해관계가 있었던 터입니다. 필립 샌즈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1949년 무렵 미국과 영국의 나치 추적 의욕은 식어가고 있었고, 새로운 목표는 가치 있는 인물을 활용하는 것, 즉 유럽에서 끌어내 미국으로 데려오거나 은밀히 남미로 보내는 것이었다. 미국은 쥐의 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 형성에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남미로 도피한 나치 장기 명단에는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범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설계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 게슈타포 출신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 유대인 학살용 '가스 트럭'을 고안한 발터 라우프,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 소장 프란츠 스탕글, 라트비아 유대인 학살의 배후 에두아르트 로슈만 등입니다.
일찍이 1946년, 미국 정보당국은 이미 나치 도피를 도운 바티칸 관련 단체를 최소 20곳 이상 식별해 낸 바 있습니다. 훌트 주교는 그중 대다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이 '구원한' 범죄자들처럼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아니마 신학교 총장직에서 물러난 것 외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훌트 자신의 말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눈에는 눈'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