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케말이 폰토스 대학살의 가장 잔혹한 국면을 연 날, 5월 19일의 역사

오늘은 폰토스 그리스인(폰틱 헬레니즘) 대학살 추모일입니다. 이 날은 1994년 그리스 의회의 결정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비잔티움 멸망 후에도 지켜진 그리스 정체성

sansimera.gr의 보도에 따르면, 비잔티움 제국 해체 이후 소아시아 북부 폰토스 지역에는 그리스 문화의 정예 집단이 오랜 세월 뿌리내리고 살아왔습니다.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트라페준타(트레비존드) 함락은 이들의 그리스적 정신과 민족 의식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모국과 분리된 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소수였지만, 이들은 주로 도시 중심지에 거주하며 빠르게 지역 경제를 장악했습니다.

인구와 교육의 눈부신 성장

경제적 부흥은 인구적·지적 성장과 맞물렸습니다. 1865년 폰토스 그리스인은 26만 5천 명, 1880년에는 33만 명, 20세기 초에는 70만 명에 달했습니다. 학교 수도 1860년 100개교에서 1919년에는 1,401개교로 급증했으며, 그중에는 저명한 트라페준타 프론티스테리온(Phrontisterion)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학교 외에도 인쇄소, 잡지, 신문, 클럽, 극장 등을 두루 갖추며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청년 투르크의 등장과 희망의 좌절

1908년은 오스만 제국 사람들에게 기념비적인 해였습니다. 이 해 청년 투르크(Young Turks) 운동이 부상하여 술탄을 실권에서 밀어냈고, 많은 이들이 쇠락해가는 제국의 개혁을 젊은 군인들에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곧 희망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청년 투르크는 가혹한 민족주의적 얼굴을 드러내며, 유럽 열강이 제1차 세계대전에 몰두한 틈을 타 기독교 인구 박해와 지역 튀르크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편 그리스 정부는 '크레타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터키와 또 다른 전선을 열 여유가 없었습니다.

'노동대대'라는 이름의 강제 이주

터키 당국은 '국가 안보'를 구실로 소위 '노동 징발령'(Amele Tambourou)을 통해 그리스 인구 상당수를 소아시아의 척박한 내륙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군 입대를 하지 않은 남성들은 '노동대대' 복무를 강요당했고, 채석장과 광산, 도로 공사에서 극한의 조건 속에 내몰렸습니다. 대다수는 굶주림과 고난,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산악 봉기와 케말의 등장

터키의 탄압, 살인, 추방, 마을 방화에 맞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키려 했습니다.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무스타파 케말 휘하의 터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폰토스 그리스인을 절멸시킬 길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술탄이 5세기에 걸쳐 이루지 못한 것을 케말은 단 5년 만에 해내고 말았습니다.

자치 국가 구상의 좌절

1919년 그리스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베니젤로스 정부의 일시적 지원을 받아 그리스-아르메니아 자치 국가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터키에 의해 좌절되었고, 터키는 이를 빌미 삼아 '최종 해결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919년 5월 19일, 삼순에 상륙한 케말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은 삼순(Samsun)에 상륙하여 독일 및 소련 고문들의 지도 아래 폰토스 대학살의 두 번째이자 가장 잔혹한 국면을 개시했습니다. 1922년 소아시아 참사 때까지 목숨을 잃은 폰토스 그리스인은 20만 명을 넘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 숫자를 35만 명까지 추산합니다.

피난민의 행로와 새 터전

터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은 러시아 남부로 피난갔고, 약 40만 명은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지식과 근면함으로 당시 파탄 직전이던 그리스 국가의 재건에 크게 기여했으며, 북부 그리스의 인구 구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추모일 제정

상당히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리스 의회는 1994년 2월 24일 만장일치로 5월 19일을 폰토스 그리스인 대학살 추모일로 선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