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코 베기부터 거세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잔인한 형벌 이야기

천 년 역사를 지닌 비잔티움 제국에는 오늘날과 같은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있었다면 재판 전까지 죄인을 임시로 가두어 두던 지하 감옥뿐이었죠. 형벌은 대개 처형 집행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운이 좋아 목숨은 건졌다 해도 팔이나 다리 등 신체 일부를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체 훼손형 외에 가장 흔한 처벌은 금전 벌금, 재산 몰수, 그리고 수도원 강제 수감이었습니다.

교회, 성역으로서의 피난처

교회는 고대의 신성한 신전을 연상시키는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살인을 저지른 뒤 수도원으로 도피했다면, 국가 권력조차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재산을 모두 잃은 채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 했으며, 만약 살인이 계획적 범행이었다면 영원히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국에서 신체 형벌과 사형은 어떻게 집행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화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개적 굴욕, '소라 껍데기'가 되다

비잔티움에도 '공개적 치욕'이라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방화, 절도, 간통 등의 죄로 체포된 자들은 법에 따라 형을 선고받기 전에 먼저 공개적으로 끌려 다녀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방식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죄인의 머리를 밀고, 재로 얼굴을 검게 칠한 뒤, 넝마를 입혀 당나귀 위에 거꾸로 태웠습니다. 이때 죄인은 당나귀의 꼬리를 붙잡고 있어야 했죠. 이후 죄인은 도시 거리를 행진했고, 사람들은 모여들어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흙과 돌을 던졌습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보다 죄인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소라 껍데기를 씌웠다'는 표현은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소아성애자, 도둑, 간음자, 탈영병 등이 끌려 다닐 때에는 '플라타리오(platsario)'라 불리는 특별한 선전 담당자가 거리에서 죄상을 선포해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최대한 큰 소리로 들려주기 위해 그는 '부키노(bukino)', 즉 동물 뿔로 만든 나팔을 사용했습니다.

가혹한 신체 형벌

도둑에 대한 처벌은 그만큼 가혹했습니다. 누군가 절도로 적발되면 가장 먼저 달군 쇠로 이마에 낙인을 찍어 평생 지워지지 않게 했습니다. 이후 또다시 도둑질을 하다 잡히면 팔이나 다리를 절단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간통죄를 지은 남녀에게는 코를 자르는 형벌이 선고된 뒤 추방되었습니다. 다른 범죄와 달리 먼저 형벌을 받고 나서 내쫓겼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한편 군대 탈영 같은 범죄에는 실명시키기 같은 더욱 가혹한 형벌이 부과되기도 했습니다.

'눈에는 눈'이라는 법 원칙에 따라 간통을 저지른 남성은 남성의 상징을 잃을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또한 죄를 저지르는 데 사용된 신체 부위를 그대로 훼손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위증죄에는 혀를 잘랐고, 짐승과의 성행위에는 남근을 잘랐습니다.

황제 권력에 대한 음모와 같은 반역죄에 대한 처벌로 실명형 역시 매우 흔했습니다.

태형과 채찍질 역시 보편적인 형벌이었으며, 노예에게는 자유민보다 훨씬 가혹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종종 복합 형벌로서 신체 훼손형과 함께 집행되기도 했습니다.

코 베기부터 거세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잔인한 형벌 이야기

사형

로마법은 빈번하게 선고되던 사형과 같은 극단적 형벌을 허용했지만, 비잔티움 법과 레오 3세의 법전 '에클로게(Ekloga)'는 마침내 이를 '가장 자비로운'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때까지 사형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죄인은 작은 칼이나 검으로 목이 잘리는 방식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일부 범죄에 대해서는 형벌의 정도를 정확히 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해당 판사의 재량에 맡겼고, 그 결과 판사의 성향에 따라 사소한 범죄조차 사형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잘 알려진 '중죄(capital punishment)'가 항상 '사형'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금속형(metallism)', 즉 광산과 채굴장에서의 강제 노동, 혹은 가혹한 형태의 유배형 같은 다른 처벌도 포함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에클로게의 법률은 각 범죄마다 형벌의 유형과 정도를 명확히 정함으로써 판사들의 극단성과 자의성을 제한했습니다.

이에 따라 방화와 살인 후 강도를 제외한 많은 형사 범죄에서 사형이 대체되었습니다. 즉, 도시에 불을 지르면 산 채로 화형당했고, 사람을 죽여 재물을 강탈하면 교수형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