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오가발루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후대 역사가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황제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평가에는 그들의 편견이 상당 부분 작용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성별 불쾌감(젠더 디스포리아)을 겪은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로마 통치자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 낮춰져 보였고, 수많은 소문이 퍼졌으며 더욱 가혹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사실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오늘날 확언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공식적인 역사는 그를 특히 가혹하게 다뤄왔는데, 앞으로 살펴볼 사건들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율리아
태양신 '엘라가발'에서 이름을 따온 헬리오가발루스는 태어날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대사제에서 로마 제국 황제로 놀랍도록 빠르게 올라선 계기는 사촌인 황제 카라칼라의 죽음이었습니다.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혼란스러운 내전의 분위기를 교묘히 이용하며 손자의 조기 권력 장악을 주도했습니다.
서기 218년 5월 16일, 라파나에 주둔한 제3군단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단 14세의 헬리오가발루스는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종교적 논란
즉위 첫날부터 헬리오가발루스는 성 스캔들과 종교적 논란으로 기억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종교 신념은 이후 이어질 논란 많은 통치의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특히 할머니는 자신과 손자의 초상화를 원로원 의사당의 빅토리아 여신상 위에 걸어두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십대 황제에게 바침을 드리도록 강요했습니다.
동방에서 가져온 태양신 바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종교의 대사제가 되기 위해 헬리오가발루스는 스스로 할례를 받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북과 심벌즈 소리에 맞춰 바알 제단 주위를 춤추며 도는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기행에 가까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큰 대가를 치른 선행 하나를 남겼습니다. 정치적 의사결정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던 엄격한 관행에 맞서 여성의 원로원 참여를 허용한 것입니다.
풍만했던 성생활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헬리오가발루스는 눈에 화장을 하고, 체모를 제거하고, 화장품으로 외모를 가꾸고 가발을 착용한 뒤 궁을 나와 로마의 선술집과 창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궁전의 한 방은 그가 열던 난잡한 오지(난교 파티)에 전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알몸으로 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그의 측근들이 '보답'하기 위해 뽑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를 '여주인님'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자주 성관계를 가졌던 남성들에게 원로원 직책, 군직, 궁정 요직 등을 하사했습니다. 실제로 무희와 '고르디우스'라는 전차 경주자가 강력하고 명망 높은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의 수장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발사에게 도시의 곡물 공급을 맡긴 파격적인 임명도 그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다음 이야기는 아마 진실과 거리가 멀겠지만, 당시 헬리오가발루스가 성기의 크기를 기준으로 요직을 하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결혼과 연인들
헬리오가발루스는 세 명의 여성과 네 번 결혼했습니다. 그중 베스타 처녀였던 아퀼리아 세베라와 두 번 결혼하여 로마 사회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연인은 히에로클레스라는 전차 경주자였습니다. 아나톨리아 남서부 출신의 금발 노예 검투사였던 그를 헬리오가발루스는 '내 남편'이라 불렀고, 자신은 '히에로클레스의 아내', '히에로클레스의 여왕'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공개 의식에서 지금의 터키 지역 출신 운동선수 조티쿠스와 결혼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젠더 플루이드, 유동적인 성 정체성
이 십대 황제는 최초로 알려진 젠더 플루이드 로마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됩니다. '젠더 플루이드'는 특정한 성별에 동일시하지 않거나 성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다만 역사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신뢰도도 떨어지기 때문에, 이 통치자들은 트랜스젠더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별을 바꾸기를 갈망했고 종종 수술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수술을 감행해 줄 의사에게 거액의 보수를 약속했다고 전해집니다.

난잡함과 살인
이 황제에게 귀속된 악명 높은 일화는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연회와 만찬에 초대된 수십 명의 하객이 기묘한 장식 아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객들이 질식해가는 동안 천장에서 꽃잎과 꽃송이가 흩날렸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치스러운 연회 중 하나에서는 하객들이 타조 뇌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만 600마리의 타조가 잡혀 요리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악명 높았던 칼리굴라처럼 십대 헬리오가발루스는 부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당대 가장 화려한 장신구와 값비싼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가혹한 최후
군부는 그의 문란한 생활 방식에 빠르게 환멸을 느꼈고, 그의 집권을 지지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할머니는 프라이토리안 근위대 사이에서 손자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눈치챘고, 헬리오가발루스를 대체할 또 다른 어린 손자를 염두에 두며 제국에서 그를 없애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 19세가 된 헬리오가발루스는 어머니 율리아 소이미아스와 함께 도피에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병들에게 상자 속에서 발각되어 서로 끌어안은 채 잔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참수당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긴 뒤 시신을 로마의 거리를 끌고 다니다가 머리 없는 시체를 티베르 강에 던져 넣었습니다.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움받던 전 황제와 가까웠던 이들, 연인 히에로클레스를 포함한 측근들까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헬리오가발루스의 종교 포고령은 폐지되었고, 여성은 다시금 원로원 회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