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크렘린을 뒤흔든 폴란드 여성들: 러시아 황궁의 역사를 바꾼 세 명의 여인

운명은 이 폴란드 여성들을 러시아 권력의 한복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인품 덕분에 러시아, 나아가 유럽과 세계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여성들이 크렘린에 흔적을 남긴 시기는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는 변방의 낙후된 국가에서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화는 러시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였습니다. 여성은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의 남자가 어떤 여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면, 그 여성은 그것을 위대한 영광으로 여기며 복종해야 했습니다. 이 세계에 팽배한 가부장적 질서에 맞서려면 엄청난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용감한 여성들 가운데에는 폴란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마리나 므니시흐 (1588–1614)

그녀는 러시아 왕좌에 오른 최초의 폴란드 여성이자 최초로 대관식을 치른 차리나였습니다. 그녀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물 중 하나인 '위조자 드미트리'의 아내가 되었는데, 드미트리는 자신이 참주 이반 4세의 기적으로 살아남은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정체는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는 인물로, 자칭 조상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폴란드의 지원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도미에시 보이보다 유지 므니시흐를 상대로 자신의 황실 출신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계략에 밝은 이 폴란드 귀족은 곧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지원의 대가로 드미트리는 마리나 므니시흐와 결혼하여 그녀를 모스크바의 차리나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약속대로 1606년 5월 18일, 크렘린에서 모스크바 차르 드미트리는 폴란드 귀족 영애와 결혼했고, 그녀는 곧이어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새 차리나는 유럽식 의상으로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했고, 이렇게 하면 신민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순진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비난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아직 낯설었던 포크를 식탁에서 사용한 것마저 경건한 러시아인들에게는 악마의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크렘린을 뒤흔든 폴란드 여성들: 러시아 황궁의 역사를 바꾼 세 명의 여인

마리나 므니시흐

마리나의 통치는 단 9일 만에 끝났습니다. 남편이 정치적 적들에게 암살당한 것입니다. 그녀는 야로슬라블로 추방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 차리나의 화려한 삶을 맛본 므니시흐는 러시아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운명이 다시 바뀌어 왕관을 다시 쓸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여러 민족의 여주인이자 모스크바의 차리나인 내가 다시 신민이 되어 폴란드 귀족 영부인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는 없소”라고 그녀는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한 명의 여성 정치가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스타로두브에 산 살아남은 차르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났을 때, 마리나는 권력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그를 자신의 살해당한 남편이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모스크바 원정에도 동행했습니다. 주장된 배우자가 죽은 후에는 코사크 아타만 자루츠키와 연을 맺었고, 자루츠키는 그녀의 아들을 러시아 왕좌에 앉히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므니시흐에게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동거인, 그리고 아이는 정부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남자와 아이는 처형되었고, 마리나는 콜롬나로 보내져 그곳의 크렘린에 유폐되었으며, 1615년 봄 신비로운 정황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가피야 그루셰츠카야 (1663–1681)

그녀는 러시아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표트르 1세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될 만한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루셰츠카야는 비범한 여성이 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한 러시아 또래들과 달리, 아가피야는 아버지인 체르나프스크(현 리페츠크주) 태수 세묜 덕분에 읽고 쓸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하프시코드를 연주했고 프랑스어를 이해했으며(말하기는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좋은 예법을 익히기 위해 바르샤바 과부가 가정교사로 초빙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아가피야는 당시 표현을 빌려 '폴란드풍'이라 불리는 옷차림을 했습니다. 모스크바 루테니아에서는 방임된 여성만 목선을 드러냈음에도 그녀는 낮은 네크라인의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귀신을 쫓는 부적 목걸이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 뿌리와 옆머리를 드러내는 이른바 '폴란드 모자'를 썼는데, 당시 관습상 여성은 가족들 앞에서조차 머리를 숨겨야 했습니다.

바로 이 러시아적 관습과 어울리지 않는 아가피야의 차림새가 19세의 차르 표도르 3세(1661~1682)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종려 주일에 교회에서 그 소녀를 보았습니다. 군주는 소녀의 미모에도 매료되었습니다. 키가 크고 여성스러운 몸매, 푸른 눈, 돋보이는 체격. 그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루셰츠카야의 해방적인 면모를 큰 결점으로 여긴 궁정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뜻을 이루었습니다.

크렘린을 뒤흔든 폴란드 여성들: 러시아 황궁의 역사를 바꾼 세 명의 여인

아가피야 그루셰츠카야

표트르 1세의 형인 표도르 차르는 러시아에서 개혁을 추진하면서 아내의 진보성을 장점으로 여겼습니다. 아가피야는 남편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궁정 유행의 변화에도 직접 기여했습니다. 이 폴란드 여성의 권유로 군주는 궁정 신하들에게 유럽식 의복을 입고 머리와 수염을 깎으라고 명령했는데, 이 개혁은 후대에 흔히 표트르 1세의 공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아가피야의 시누이들은 폴란드식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젊은 차리나의 개입 덕분에 이전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음식을 스스로 고를 권리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크렘린의 두터운 벽 뒤에 숨어 지내던 선대 차리나들과 달리, 그녀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심지어 남편과 함께 외국 대사를 접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보적인 아가피야의 통치는 1년 남짓 지속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은 직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요안나 그루진스카 (1795–1831)

마리나와 아가피야와 달리, 그루진스카 백작영애에게는 정치적 야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자 사실상 폴란드 왕국의 통치자였던 콘스탄티 대공이 폴란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게 만든 여인이었습니다.

36세의 로마노프는 1815년 바르샤바의 자온체크 총독 저택 무도회에서 요안나를 만났고, 그것은 첫눈에 반함이었습니다. 결혼은 감히 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공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비록 1801년부터 아내와 별거 중이었지만요. 게다가 황실법은 로마노프 가문의 남성이 통치 가문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는데, 요안나는 '단지' 백작가문의 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는 확실히 그루진스카를 갈망했지만, 폴란드 여성은 혼외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했는데, 그전까지 그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무력으로라도 쟁취하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불행한 여성들의 가문은 차르 가문의 일원과 동거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크렘린을 뒤흔든 폴란드 여성들: 러시아 황궁의 역사를 바꾼 세 명의 여인

요안나 그루진스카

요안나는 대공에게 금지된 열매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가족과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형인 알렉산드르 1세가 이혼과 재혼을 허락할 때까지 버텼습니다. 백작영애와의 결혼의 대가는 왕위 계승권 포기였고, 콘스탄티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안나와 콘스탄티는 1820년 5월 24일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의 가정생활은 이상적이었고, 대공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내를 끊임없이 칭송했습니다. “나는 가정생활 속에서 행복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내 아내다.” 그는 공석에서도 아내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강조했습니다. “여기 나를 문명화한 폴란드 여성이 있네. 그녀와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그저 평범한 러시아 곰이었네.”

이 글은 다음 도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Violetta Wiernicka, 『크렘린을 다스린 폴란드 여성들』(Polish Women Who Ruled the Kremlin), Bellona,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