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운(John Brown)은 캔자스의 포타와타미 크릭(Pottawatomie Creek) 일대에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곳에서 감행한 것은 노예제 찬성파 정착민들을 대상으로 한 기습 공격으로, 1856년 5월 24일 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포타와타미 학살이란?
1856년 5월 24일 밤, 급진적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존 브라운은 자신의 아들들과 추종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무리를 이끌고 포타와타미 크릭 인근에 살던 노예제 찬성파 정착민 다섯 명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습니다. 역사서에서는 이 사건을 '포타와타미 학살(Pottawatomie massacre)'이라고 부르며, 미국 남북전쟁 이전 가장 극단적인 노예제 반대 운동의 사례로 꼽습니다.
공격의 배경, '피바다 캔자스' 시대
당시 캔자스 준주는 주민들의 투표로 노예제 허용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대거 몰려들면서 극심한 유혈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혼란기를 가리켜 역사학계에서는 피바다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브라운이 무력 행동을 결심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방아쇠가 있었습니다. 바로 1856년 5월 21일, 노예제 찬성파 무리가 반노예제 거점 도시인 로렌스(Lawrence)를 약탈하고 불태운 사건입니다. 또한 하루 뒤인 5월 22일에는 연방 상원에서 노예제 비판 연설을 했던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이 망치로 구타당하는 만행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브라운은 노예제 세력에 대한 응징과 보복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포타와타미 크릭에서의 기습 공격에 나선 것입니다.
역사적 의미와 여파
포타와타미 학살은 캔자스의 폭력 사태를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동시에 존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3년 후인 1859년 버지니아의 하퍼스페리(Harpers Ferry) 연방 무기고 습격 사건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했지만, 노예제 폐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인물로서 남북전쟁의 서막을 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