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은 미국 독립혁명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 해였습니다. 보스턴 거리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와 영국 의회의 정책 후퇴는 식민지 주민들의 반영(反英) 감정을 한층 격화시켰습니다. 이 글에서는 1770년을 장식한 주요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살펴봅니다.
연초의 불씨: 골든 힐 충돌과 소년의 죽음
1월 19일, 뉴욕 골든 힐(Golden Hill)에서 영국 주둔군 병사와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골든 힐 사건'은 독립 이전 미국에서 영국군과 주민 간에 처음으로 피가 흘린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보스턴 학살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2월 22일에는 보스턴에서 관세 담당관의 집에 항의하던 군중 속 11세 소년 크리스토퍼 자이더(Christopher Seider)가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천 명이 참여한 그의 장례식은 도시 전체의 분노를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
1770년 3월 5일 저녁,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관세청 앞에서 눈덩이와 돌을 던지는 군중과 영국 병사들이 대치하던 중 병사들이 발포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로 흑인 선원 출신 노동자 크리스퍼스 어택스(Crispus Attucks)를 포함해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직후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등은 이를 '학살'이라 이름 붙이며 반영 여론을 결집시켰고, 폴 리비어(Paul Revere)가 제작한 판화가 식민지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가며 여론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재판: 존 애덤스의 위험한 선택
흥미롭게도 발포한 영국 병사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훗날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였습니다. 그는 '법의 지배'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인기와는 반대되는 길을 택했고, 재판 결과 병사 6명은 무죄를, 나머지 2명은 과실치사죄만 인정받아 엄지손가락 낙인형에 그쳤습니다. 이 공정한 재판은 오늘날까지 법치주의의 모범 사례로 회자됩니다.
4월 12일, 타운젠드 법안 대부분 철폐
식민지의 강력한 불매 운동과 무역 위축에 시달리던 영국은 1770년 4월 12일, 노스 경(Lord North) 내각 주도로 타운젠드 법안(Townshend Acts)이 부과한 관세 가운데 유리·페인트·종이 등에 대한 세금을 철폐했습니다. 그러나 입법권을 상징하는 차(茶) 관세만은 고수했는데, 바로 이 결정이 3년 뒤 보스턴 차 사건(1773)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됩니다.
대서양 건너, 1770년의 세계
1770년의 역사는 아메리카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 호주 대륙: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이끄는 엔데버호(Endeavour)가 4월 말 호주 동해안 보타니 만에 도착했고, 영국은 같은 해 8월 동부 해안을 '뉴사우스웨일스'로 명명하며 영유를 선언했습니다.
- 프랑스 왕실: 5월 16일,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14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합은 훗날 프랑스 혁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왕실사의 중요한 장면이 됩니다.
- 위대한 탄생: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8월 27일)과 음악의 거장 루트비히 판 베토벤(12월 17일 세례)이 이해에 태어났습니다.
1770년이 남긴 의미
보스턴 학살은 '자유의 순교자'라는 상징을 만들어냈고, 타운젠드 법의 부분 철폐는 식민지에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었지만 문제의 근본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남겨진 차 관세는 결국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으로, 그리고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으로 이어지며 미국 독립혁명의 불씨를 지핍니다. 1770년은 그렇게 혁명의 서막을 조용히 열어준 해로 기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