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문호, 그리고 종교 운동의 창시자
레프 톨스토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가 사상가이자 '톨스토이주의'라 불리는 종교·사회 운동의 창시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그의 견해는 러시아 정교회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결국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이것은 과연 마땅한 조치였을까?
생전에도 톨스토이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나 카레니나』가 연재(1875~1877)된 뒤 단행본(1878)으로 출간되었을 때는, 아내들이 주인공 안나를 본받을까 우려한 남편들이 아내에게 책 읽기를 금지할 정도였다.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1918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에서 그의 책은 4억 3,600만 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최고 판매고를 올렸다.

손주들과 함께한 톨스토이
그러나 성공한 예술가라는 화려한 외피 뒤에는, 가정 안에서는 폭군이었고 모순된 감정에 시달리며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한 남자, 동시에 깊은 종교적 사색가가 있었다.
세계관의 형성
1862년 9월 23일, 34세의 레프는 18세의 소피야(소냐) 베르스와 결혼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 야스나야폴랴나로 거처를 옮겼다. 두 사람의 결혼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지만, 부부의 삶을 목가적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세계관을 지녔던 이 작가는, 정작 가정 안에서는 보수적이고 전제적인 남편이었다. 그의 생각에 아내는 외모를 꾸미거나 사교 활동을 접고, 오직 살림과 자녀 양육, 남편을 기쁘게 하는 일에만 헌신해야 했다. 톨스토이의 전기 작가 앙리 트루아야는 이렇게 적었다.
젊은 소냐의 매력 — 명랑한 성품, 솔직함, 우아함, 유흥에 함께하려는 의욕, 남성들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 — 은 그녀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함께한 톨스토이
소피야가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새 옷을 사면 남편은 그녀를 경솔하다고 비난했다.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톨스토이 영지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손님을 받지도, 친구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소니아는 이 때문에 몹시 고통받았고, 친척들을 그리워하며 슬픈 편지를 썼다. 젊은 아내는 사실상 세계로부터 고립된 것이었다.
한편 레프는 집필에만 몰두했고, 18세의 아내는 야스나야폴랴나의 경영을 도맡아야 했다. 그녀는 열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다섯 명은 유아기에 요절했다).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추종했던 작가는, 유선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아내에게 직접 수유를 강요했다. 남편에게는 신념에 대한 충실이 가족의 행복과 평온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작가? 아니, 철학자
1870년대에 들어 레프는 지금까지의 글쓰기와 삶의 의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훗날의 철학 에세이 중 하나에서 그는 왜 아이들을 키우고 새로운 소설을 쓰며 재산을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했다. 이 내면의 위기는 심할 때면 자살 충동으로까지 치닫곤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속한 계급이 누리는 특권과 안락은 불필요할은커녕 해롭기까지 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버렸다. 간소한 옷을 입고 육체노동을 시작했으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나아가 소피아에게 하인들을 내보내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를 '무지크(농부) 백작'이라 불렀다.
레프는 아내와 자식들마저 자신의 신념을 따르기를 원했고,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면 분노했다. 그는 소피아를 자신의 최대의 적으로 여겼다. 남편이 재산을 죄악으로 여기는 동안, 그녀는 재산 상태, 아늑한 실내, 좋은 음식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아내에 대한 적의는 갈수록 커져갔다. 그는 그녀의 헌신과 도움을 잊은 듯싶었다. 그녀는 남편의 원고 수천 페이지를 베껴 써 준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홧김에 그는 재산을 포기하고 가족에게 넘겨버리기도 했다.
영적 탐구의 시기 동안 작가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세바스토폴 이야기』 같은 자신의 걸작들을 교만과 허영의 산물로 여겼다. 누군가 문학 작품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화제를 받지 않았다. 1908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안나 카레니나』 같은 훌륭한 작품들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
기차역에서의 죽음
이 무렵 그는 자신만의 종교·사회 이론,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핵심은 두 가지였다.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사치 없는 소박한 삶. 톨스토이의 종교관은 정교회의 공식 교리와 달랐고, 그의 좌우명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였다.
그는 인간 죄의 근원이 국가의 원칙에서 비롯되는 강제에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국가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보았고, 실제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국가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톨스토이의 죽음을 전해 듣는 화가 일리야 레핀
시간이 지나면서 톨스토이는 점점 급진화되었다. 그는 교회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평화와 행복을 죽음 이후, 즉 천국에서나 찾을 수 있다는 교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01년, 그는 신자가 교회라는 매개 없이도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선언했고, 이로 인해 파문당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종교·철학 저술을 계속하는 데 보냈다. 야스나야폴랴나에는 많은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런 삶은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는 모든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다. 마침내 1910년 10월 28일, 그는 담당 의사와 함께 영지를 떠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뚜렷한 계획은 없었다. 그는 그저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며 수도원과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여행 중 감기에 걸린 그는 병이 폐렴으로 번졌다. 그는 현재 리페츠크주에 속한 아스타포보역에서 기차에서 내렸고, 역의 한 방에 머물렀다. 여섯 명의 의사가 불려왔지만, 그들은 그를 살리지 못했다. 1910년 11월 20일, 톨스토이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 문헌
- 트루아야 A., 『레프 톨스토이』, 모스크바, 2007.
- 바신스키 P., 『레프 톨스토이: 자유로운 인간』, 모스크바, 2017.
- 클리멘코바 M.,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의 비극", 『소베세드니크』, 2013년 5월 11일 (2020년 11월 15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