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의 운명을 바꾼 비수 대전
세계사에는 단 한 번의 승패로 시대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뀐 전투들이 있습니다. 일본이라면 오케하자마 전투나 세키가하라 전투가 그 예이겠지요. 중국 역사에서 이에 해당하는 전투가 바로 서기 383년에 벌어진 비수 대전(淝水之戰)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꼽히며,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이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전진(前秦) 측의 상황
비수 대전은 383년,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과 한족의 정권인 동진(東晉)이 맞붙은 전투입니다.
거대한 국가였던 후한이 멸망한 뒤, 중국은 위·촉·오 삼국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것은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아닌 사마의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위의 실권을 쥔 사마씨 가문은 마침내 조씨 왕조를 대신하였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진(晉)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합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사마씨 황족들끼리 벌인 내분으로 국력을 크게 잃었고, 결국 다섯 이민족이 북방에서 잇달아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것이 저족이 건국한 전진이었습니다.
전진의 군주 부견(苻堅)은 여러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하고자 북중국을 통일했고,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 현재의 난징)을 향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실제 병력은 백만의 절반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이어서 중국 역사상 최대, 나아가 세계 역사상 최대급의 전투로 기록되었습니다.
전진군의 구성은 저족을 중심으로 선비족, 강족, 흉노 등 이른바 오호와 한족까지 섞인 거대한 혼성군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했던 전진이었지만, 불안 요소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혼성군을 통솔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한족 출신 참모 왕맹(王猛)이 이 전투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점입니다. 대군을 이끌려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필요한데, 전진에는 그런 장수가 부족했습니다.
둘째는 주축인 저족의 불만이었습니다. 부견은 이상 사회를 추구한다며 자신의 출신 민족인 저족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수도 장안에서 먼 곳으로 옮겨 살게 했고, 이것이 저족의 불만을 샀습니다.
반면 다른 민족들은 고향이 전진에게 정복당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변수는 한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의 지배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맹은 죽기 전에 "동진을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부견은 이를 듣지 않고 결전의 행군을 개시합니다.
동진(東晉) 측의 상황
동진에서는 이 시기의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환온(桓溫)이 이미 죽고, 정무는 그의 동생 환충(桓沖)과 사안(謝安)이 맡고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전진에 맞서기 위해 사안은 조카 사현(謝玄)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여러 방책을 준비합니다.
전진군이 수십만에 달하는 반면, 동진군은 겨우 8만 명. 승부는 불을 보듯 뻔해 보였습니다.
| 구분 | 전진(前秦) | 동진(東晉) |
|---|---|---|
| 지휘관 | 부견(苻堅) | 사안(謝安)·사현(謝玄) |
| 병력 | 명목상 백만(실제 수십만) | 약 8만 |
| 결과 | 대패, 이후 국가 붕괴 | 대승 |
비수 대전의 전개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습니다.
전진의 작전은 단순했습니다. 동진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기다렸다가 일격에 타격하는 것. 이를 위해 강변까지 진군한 부대를 조금 물러나게 하고, 상대가 강을 건너는 틈에 총공격을 가해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싸우기 전에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어야 마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진군은 제대로 물러서지 못했습니다. 물러서려던 순간 어디선가 "졌다! 도망쳐라!"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면서 전진군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집니다.
사실 이 외침은 전진군 안에 있던 한족이 지른 것이었습니다. 전진은 이전 전투에서 형주의 거점 양양(襄陽)을 함락하며 항복한 한족들을 그대로 최전선에 배치했는데, 그 배후 조종자는 부견에게 관직을 내리고 중용했던 주서(朱序)였습니다.
강을 건너온 동진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추격에 나섰고, 더욱 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하나둘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전진의 병사들은 애초에 이 전쟁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찬성한 것은 전연(前燕)의 왕족 출신 모용수(慕容垂)뿐이었고, 다른 병사들은 차라리 전진과 동진이 함께 망해버리길 바라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주서 외에도 얼마 전까지 전량(前涼)의 왕이었던 인물이 전진군의 혼란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적에게 정복된 나라의 옛 군주를 최전선에 배치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고 해야겠지요.
전진군은 완전히 붕괴했고, 부견은 모용수의 구원 덕분에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갑니다. 모용수의 아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부견을 제거할 것을 권했지만, 부견의 은혜를 입었던 모용수는 그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훗날 모용수는 전진을 떠나 후연(後燕)을 세웁니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진이 패배하고, 동진의 대승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패배로 전진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부견은 자신의 부하였던 인물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북중국은 다시 크게 어지럽혀졌고, 저족을 대신해 선비족이 부상하여 결국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한편 승자인 동진 쪽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영웅 사안은 이 전투 2년 뒤 세상을 떠났고, 사마씨 황족들의 내분이 격화된 끝에 동진은 이 전투 약 40년 후 유유(劉裕)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비수 대전을 되돌아보며
이 패배는 부견이라는 인물의 이상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견은 분명 훌륭한 군주였고, 전진이 그의 치세에 크게 판도를 넓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 부분 왕맹의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부견은 생전의 왕맹에게 승상을 비롯해 여러 고위 관직과 작위를 아낌없이 내렸지만, 그만큼 다른 신하들의 질투와 시기를 샀고, 여기서 이미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부견은 따뜻하게 대해주면 모두가 자신의 은혜를 느낄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그는 자신이 특별히 우대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만약 전진이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중국에는 거대한 왕조가 들어섰을 것이고, 중국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중국 최초의 이민족 왕조가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왕조가 세워졌다 해도 오래가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부견의 사례는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줍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광무제처럼 덕망과 능력을 갖춘 창업 군주가 여전히 필요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