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가가 백만 석의 창시자, 마에다 도시에의 생애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가가 백만 석의 창시자, 마에다 도시에

마에다 도시에(前田利家)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아라코의 영주 마에다 도시하루(前田利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집안이 특별히 유리하지 않았고, 가문을 계승할 서열도 아니었으며,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가 백만 석(加賀百万石)'의 창시자가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누구보다 담력이 커서, 육천마왕으로 공포의 대상이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조차 "간에 털이 돋은 사내"라고 평했던 마에다 도시에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창의 마타자(槍の又左)'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가가 백만 석의 창시자, 마에다 도시에의 생애

젊은 시절 마에다 도시에는 가난했습니다. 그 정도로 가난해서,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아시가루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웃으로 지낼 정도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매우 친밀했던 두 가족은 기요스 성의 성하 마을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전란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며 꿈을 나누었고, 이 우정은 평생 지속됩니다.

도시에는 처음에는 노부나가의 중신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를 섬겼지만, 15~16세 무렵부터는 노부나가의 소동(小姓)으로 직접 시중들게 됩니다.

당시 노부나가의 소동들은 '우츠케(うつけ)'라 불렸는데, 젊은 도시에 역시 화려한 옷차림에 말다툼을 즐기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데뷔전에서 적장의 목을 베며 공을 세운 그는 노부나가의 정예 부대인 '아카호로슈(赤母衣衆)'에 발탁되었고, '마쓰(まつ)'라 불리는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히데요시와의 만남도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순탄해 보이던 도시에의 앞길이었지만, 스무 살 초반에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던 차방주(茶坊主)와 싸우다 그를 죽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노부나가는 대노하여 도시에에게 할복을 명했지만,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의 구명 탄원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나 오다 가문에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추방된 후 도시에는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1년 후,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를 들은 도시에는 더는 참지 못하고 무장을 갖추어 허가 없이 오케하자마 전투에 뛰어듭니다.

'창의 마타자'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장수의 목을 베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여전히 도시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는 이후에도 무단 출진을 거듭하며 공을 쌓았고, 마침내 노부나가는 그를 다시 가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어쨌든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노부나가 편에 섰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람 보는 눈은 확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객관적으로는 이마가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으니, 순수한 충성심이었는지, 노부나가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저 역시 저승에서 마에다 도시에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그런 이야기는 제쳐두고, 도시에는 노부나가가 가는 곳마다 종군하며 아사이·아사쿠라 군과의 가네가사키·아네가와 전투, 혼간지와의 전투, 잇코 잇키 진압 등에 참전했습니다. 다케다 가문과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철포대(鉄砲隊)로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은인이기도 한 시바타 가쓰이에의 군에 가담해 가가의 잇코 잇키를 평정하고 호쿠리쿠 방면에서 무공을 쌓았으며, 마침내 나나오 성주가 되어 23만 석 영지를 거느린 다이묘로 성장합니다.

전국 시대의 전형적인 파란만장한 출세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부나가 사후

1582년, 극동의 섬나라 지팡구, 즉 일본에서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本能寺)에서 습격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대철환(中国大返し)'으로 이름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바꾼 옛 친구 도키치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합니다.

당시 마에다 도시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대치 중이었고, 명백히 한발 늦게 사태를 접하게 됩니다.

결국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누구냐가 문제가 되면서,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대립은 불가피해집니다.

일본 전역이 양군의 동향을 주시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은 마에다 도시에가 어느 쪽에 설지에 집중됩니다.

젊은 시절 함께 꿈을 나누던 절친인가, 아니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가?

그때 도시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양군의 대결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벌어집니다.

23만 석의 강대한 병력을 보유한 마에다 도시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측에 서기를 택합니다.

'그래도 은인 편에 선 것이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마에다 도시에는 끝까지 병력을 움직이지 않다가 전환이 기울자 전장을 떠나버립니다.

절친을 배신하지도 않고, 은인을 배신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전투가 끝난 후 시바타 가쓰이에는 마에다 도시에를 직접 찾아갔다고 합니다. 가쓰이에는 짧게 "고맙다"라고 감사의 말만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찾아옵니다. 히데요시는 "배고프니 밥이나 먹게 해다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도시에는 히데요시의 든든한 동지로서 전란을 헤쳐 나가며, 시코쿠·규슈·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고, 절친이 천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젊은 날의 터무니없어 보이던 꿈, '천하인이 되겠다'는 꿈은 실제로 실현된 것입니다.

천하 통일 이후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가가 백만 석의 창시자, 마에다 도시에의 생애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개명하고 간파쿠(関白)·태합(太閤)의 지위에 올라 천하인이 됩니다.

마에다 도시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와 함께 고다이로(五大老)에 임명되어 히데요시를 보좌하면서 다른 다이묘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천하인이 된 후의 히데요시에게도 솔직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도시에였다고 하며, 그는 사후에도 도요토미 가문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습니다.

천하를 노리던 이에야스조차 도시에 앞에서만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증거로, 1599년 마에다 도시에가 사망하자 이에야스는 곧바로 야망을 드러냈고, 이듬해인 1600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어, 15년 후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도시에 사후, 그의 아내 마쓰는 가가 정벌의 뜻을 보인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에야스는 마쓰에게 거스르지 못했고, 마에다 가문은 이후에도 그대로 가가를 다스리며 번영을 이어갑니다.

마에다 도시에에 대한 평가

어떤 의미에서 그는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전국 시대에서 가장 운이 좋은 인물은 단연 히데요시였지만, 도시에는 아마 그다음으로 운이 좋은 인물일 것입니다.

물론 운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천하의 노부나가조차 인정한 남다른 담력, 추방당하면서도 오다 노부나가를 따랐던 깊은 충성심, 은인과 절친을 배신하지 않는 의리. 바로 이러한 덕목을 지녔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에, 이에야스조차 손을 쓰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입니다.

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마에다 도시에는 그 혼란의 시대를 끝까지 살아남았고, 그의 후손들은 에도 시대 내내 가가 번의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마에다 도시에 또한 일본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남긴 영웅 중 한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