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는 어린 나이에 나고야 성의 성주가 되었지만, 당시 아버지 노부히데는 어린 상속자를 보좌하기 위해 네 명의 숙로(宿老)를 곁에 붙여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야시 히데사다였고, 이번 글의 주인공인 히라테 마사히데는 그다음가는 '제2의 필두'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와 마사히데의 관계
어린 노부나가는 하야시 히데사다보다 히라테 마사히데를 더 신임했으며, 그를 '지이(爺, 할아버님)'라 부르며 흠모하고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우츠케(大うつけ)'라 불리던 문제아 소년 노부나가와 마사히데의 관계는, 마치 친손자와 할아버지처럼 깊고 정겨운 것이었습니다…
비극의 시작

히라테 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원복(元服) 이전부터 그 곁을 지켜온 인물로, 원복 의식을 주관할 정도로 오랜 유대를 이어왔습니다. 사실상 후견인이자 가로(家老) 역할을 하던 그는,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553년, 갑작스럽게 할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향년 63세였습니다.
그가 자결한 이유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추측이 존재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것은 노부히데의 장례식에서 노부나가가 위패에 모래(真砂)를 뿌린 사건입니다. 노부나가의 교육자로서 이보다 더 큰 굴욕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노부나가의 행실을 바로잡기 위한 목숨을 건 간언(諫死)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혹은 훗날 오케하자마 전투에서처럼 '노부나가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국내외에 퍼뜨려 적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계책이었다는 설, 아니면 단순히 노부나가에게 실망하여 스승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집니다.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마사히데의 장남이 타고 있던 말을 원했으나 장남이 이를 거절하자 노부나가가 원한을 품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오다 가문은 내분 상태에 놓여 있었고, 마사히데 본인도 필두 숙로인 하야시 히데사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마사히데 가문의 뒷이야기
참고로 마사히데의 장남 고로에몬은 다케다 가문과 벌인 나가시노 전투에서 차남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삼남 진자에몬은 다케다 신겐과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에 가담하여 전사했으며, 딸은 오다 유라쿠사이(織田有楽斎)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풍류를 사랑한 온화한 인물
마사히데는 풍류를 매우 좋아하는 온화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이토 도산과의 회담, 그리고 도산의 딸 노히메와의 혼담을 주선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첫 정략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데에는 마사히데의 외교적 수완이 컸습니다.
스승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
노부나가 역시 총애하던 늙은 신하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듯합니다. 평소와 달리 그는 카스가이 군 오기무라에 절을 지어 마사히데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이 절이 바로 '정수사(政秀寺)'입니다. 이 절은 훗날 기요스를 거쳐 교토로 옮겨졌습니다.
평생 신불을 믿지 않았다는 노부나가가 사람 하나를 위해 절을 지었다는 사실은, 마사히데가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