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오다 노부나가의 첫 번째 후견인, 하야시 히데사다 — 배신과 25년 뒤 찾아온 대가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하야시 미마사카노카미(林美作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의 본명이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야시 히데사다는 오다 노부히데가 아들 노부나가를 위해 임명한 네 명의 숙로(宿老) 중 한 명이자, 노부나가의 초대 수석 후견인이었다. 그런데 이 노신은 결국 주군을 배신하고 말았고, 25년 뒤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도산만이 알아본 천재, 그러나 하야시는 포기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첫 번째 후견인, 하야시 히데사다 — 배신과 25년 뒤 찾아온 대가

'전국의 흰눈깔비'라 불리는 사이토 도산은 단 한 번의 대면에서 노부나가의 재능을 간파하며 '내 자손들은 대대로 노부나가 앞에 말머리를 묶고 설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은 노부나가의 괴행 너머에 숨겨진 재능을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하야시 히데사다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노부나가의 수석 후견인이었으면서도 그를 포기하고,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동생 노부유키 편에 선 것이다.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평소 '대우츠케(大うつけ, 큰 바보)'라 불리던 노부나가의 기행은 물론, 아버지 노부히데의 장례식에서 향을 집어 던진 폭거가 결정적이었다. 숙로 2위였던 히라테 마사히데조차 이를 만류하다 못해 할복으로 목숨을 끊었다. 의례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정서를 생각하면, 노부나가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 당연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노부나가는 적장자의 지위를 지켜냈지만, 오다 가문의 가신들은 노부나가 파와 노부유키 파로 분열되었다. 결국 형제간 골육상쟁이 벌어졌고, 두 군세는 이노 전투(稲生の戦い)에서 충돌한다. 결과는 누구나 아는 대로 노부나가의 대승이었다.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답게, 아군이라도 무능하면 과감히 잘라내고, 적이라도 유능하면 기용하는 냉철한 인재관을 지녔다. 시바타 가쓰이에와 하야시 히데사다 역시 반역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신분으로 용서받았다. 배신자 신분으로 다시 주군을 섬기게 된 하야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오다 가문의 사무 총괄로

이후 하야시는 오다 가문의 정무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요시아키의 측근들에게 보낸 통첩 문서에도 하야시의 이름이 올라 있으며, 기요스 동맹(清洲同盟)과 같은 중요 문서에도 거의 빠짐없이 그의 서명이 등장한다.

화려함은 없지만 묵직하게,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을 끝까지 떠받쳐 준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배신의 대가, 25년 뒤에 찾아오다

그러나 1580년, 이노 전투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어느 날, 노부나가는 갑자기 하야시를 추방한다.

추방의 이유는 25년 전 그 배신이었다.

왜 하필 25년 뒤에 처벌에 나섰는지는 노부나가 본인만이 알겠지만, 가신들이 하나둘 성장한 노부나가 진영에서 더 이상 하야시의 존재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부나가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세력 초창기에는 인재가 절실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천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더는 참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오다 노부나가와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갈린다.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칼끝을 겨눈 자조차 기본적으로 용서하고, 훗날 그 일로 구설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용서한 사람들의 손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하야시의 추방은 오다 가문 가신들에게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으며, 이 사건이 아케치 미쓰히데의 혼노지의 변(本能寺의 變)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실수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노부나가 밑에서는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을 테니, 만약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했다면 일본은 공포에 떨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하야시 미마사카노카미'라는 통칭이 오랫동안 널리 쓰여 왔지만, 본명은 '하야시 히데사다'이다.

말년에 추방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부나가를 배신하고도 목숨을 건졌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