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후지와라씨 번영의 초석을 다진 후지와라노 후히토

후지와라(藤原)씨라고 하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가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조인 가마타리(鎌足)를 둔 후지와라씨는 어떻게 헤이안 시대에 걸맞은 권세를 쌓아 올렸을까요?

예전에 사이메이 천황과 귀신 이야기를 할 때 후지와라씨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후지와라씨의 시조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지만,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야말로 가문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생애 연표

그럼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을 연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연도사건
659년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의 차남으로 태어남
669년가마타리가 사망. 성씨가 나카토미에서 후지와라로 변경됨
672년진신의 난 발발. 당시 13세였던 후히토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오미 조정(패전 측)의 친척이었던 탓에 하급 관리로서 강등됨
680년소가노 쇼시(蘇我娼子) 사이에서 장남 무치마로(武智麻呂)가 태어남
681년같은 부인 사이에서 차남 후사사키(房前)가 태어남
684년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三千代) 사이에서 가쓰라기왕(葛木王, 훗날의 다치바나노 모로에 橘諸兄)이 태어남
686년오쓰 황자(大津皇子)의 변.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의 즉위를 방해할 수 있는 오쓰 황자가 무고한 혐의로 자결을 강요당함
⇒ 지토 천황과 후지와라노 후히토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는 설도 있음
689년2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판사(判事)가 됨
689년5월, 구사카베 황자 사망
임종 전 구사카베 황자는 애장하던 검을 후히토에게 주며 아들 가루 황자(軽皇子)의 장래를 맡김
690년지토 여제 즉위
694년부인 소가노 쇼시 사이에서 삼남 우마카이(宇合)가 태어남
다제(多治)비의 호위로 규슈로 파견됨. 부인 미치요는 교토에 남기를 희망하여 별거
695년배다른 누이인 이오에노 이라쓰메(五百重娘) 사이에서 사남 마로(麻呂)가 태어남
697년후지와라노 후히토가 가루 황자의 후견인으로 정무 전면에 등장
지토 여제가 양위하고, 가루 황자가 몬무 천황(文武天皇)으로 즉위
딸 미야코(宮子)를 몬무 천황의 비로 보냄
미야코는 후히토의 친생녀가 아니라는 설도 있으며, 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가 중매 역할을 했다고 전해짐
701년후히토와 미치요 사이에서 안스키(安宿媛), 훗날의 고묘 황후(光明皇后)가 태어남 ⇒ 황실 외 출신으로는 최초의 황후가 됨
미야코가 아베 황자(阿倍皇子, 훗날의 쇼무 천황)를 출산
702년몬무 천황 붕어 (당시 몬무 천황의 나이 20세)
⇒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대한 의존이 더욱 깊어졌을 것으로 추정됨
707년몬무 천황 붕어
겐메이 여제(元明天皇, 덴지 천황의 딸이자 구사카베 황자의 비, 몬무 천황의 어머니) 즉위
708년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우대신(右大臣)이 됨
기존의 우대신이었던 이소노카미노 마로(石上麻呂)는 좌대신(左大臣)으로 승진 (일반적으로 좌대신이 우대신보다 위계가 높지만, 실권은 후히토가 쥐고 있었다고 함)
겐메이 여제가 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에게 '다치바나(橘)' 성을 하사
714년아베 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됨
건강상의 이유로 겐메이 여제가 딸 겐쇼 여제(元正天皇)에게 양위
실제로는 후지와라씨의 움직임... 황족·중신들이 황태자 책봉과 관련된 움직임을 위험하게 여긴 것이 양위의 이유라고 알려져 있음
716년미치요의 딸 히메야스(安宿媛)를 황태자의 비로 보냄
⇒ 훗날 고묘 황후가 됨
720년9월, 후지와라노 후히토 사망

* 월(月)은 현재의 달력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천재 정치가, 후지와라노 후히토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마어마한 경력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래서 '천재 정치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의 공적 또한 상당히 두드러집니다.

지토 천황, 구사카베 황자의 고문으로 신임을 얻은 후지와라노 후히토, 그리고 황자의 유모로서 내궁에서 신뢰받던 아가타이누카이(다치바나) 미치요. 이들이 능숙하게 혼인 관계를 형성하고 세력을 확장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지와라씨가 번영한 것은 이들의 뛰어난 수완 덕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치요의 아들인 다치바나노 모로에는 훗날 반(反)후지와라씨의 선봉장이 됩니다.

또한 훗날 쇼무 천황이 된 아베 황자 역시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손자입니다.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 형제 네 명이 천연두로 잇달아 세상을 떠난 후, 반후지와라 세력(다치바나노 모로에, 기비노 마키비, 겐보 등)이 대두했는데, 이는 나라 시대 승려 수가 급증한 이유와 감진(鑑真)의 일본 도래 이유를 살펴볼 때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쇼무 천황 치세 초기에는 재난이 계속되고 역병이 만연했으며(당시에는 재난 = 정치가 나쁘다고 여겨졌음), 불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던 그는 정치 상황의 변화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지와라씨가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것은 아닙니다. 천황가와 지속적으로 혼인 관계를 구축해 온 이상, 정계에서 세력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 시대만큼의 절대적 권력은 아니었을지라도, 불교 정치(사랑하는 승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천황이 있던 시대)를 견제하고 천황 즉위 과정에서 벌어진 음모까지, 후지와라씨의 이름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세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후지와라씨

그리고 후지와라씨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헤이안 시대에 다시 찾아옵니다.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는 섭관정치(摂関政治)의 시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씨 기타가(北家, 북가)는 천황가와 강하게 연결되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후지와라씨는 귀족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후 무가 정치(武士政治)가 이어지면서 귀족은 더 이상 정치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지만, 일본 역사 곳곳에는 여전히 후지와라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을 들 수 있습니다.

이즈음 후지와라씨는 너무나 커진 탓에 고노에가(近衛家), 구조가(九条家), 니조가(二条家), 이치조가(一条家), 다카쓰카사가(鷹司家)의 오섭가(五摂家)로 분열됩니다. 혼노지의 변 당시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후에 후지와라씨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메이지 시대 이후 공가(公家)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고노에'라는 성씨는 계속 등장합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의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바로 그 예입니다. 1993년에 총리대신이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손자로, 후지와라씨의 영향력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