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당나라 사신 파견 현황

이전 글에서 당나라 사신에 대한 내용을 잠깐 본 적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추가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헤이안 시대가 되면 894년에 당사신을 돌려보낼 때가 가까워지므로 그동안 당사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 주변국 상황 "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 탱 ・ ・ ・ 당나라가 618년에 수나라로 바뀌었다 ⇒ 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미침

[퍼스트탱(618-712)]

탕은 높은 조상이 원인이다. 수나라 말기에 자란 남성 집단이 남아 있으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2대째에는 몽골고원도 통제하게 되었다. 3대에는 수나라를 약화시킨 고구려군이 성공했다. 기반은 확실히 굳건해지겠지만, 690년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장악되고 주(周)와 국명이 바뀌게 된다.

[성당(712-765)]

주(周)는 한 세대 만에 망하여 다시 당(唐)나라로 갔다. 그 통치는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되었으나 751년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와 지배권을 놓고 벌이는 전투에서 패하여 중앙아시아의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 탈라스 전투. 현재의 키리바시 탈라스 강을 중심으로 싸운 이슬람 제국과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

755년부터 763년까지 현종이 사랑하는 이방인 양귀비와 당나라의 정치가, 그리고 황제와 양귀비의 사랑을 받았던 안녹산이 대결을 벌였다. 대규모 난과 안록산의 난으로 발전 ⇒ 당나라의 국위가 크게 훼손된 상황.

[중국 당나라(766-826 (835))]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서부 지역에서는 권력 확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당 내부에서는 환관의 헌신이 문제가 되었다.

[후기탱(827(836)-907)]

당나라 정부는 875년부터 884년까지 황조의 난으로 멸망했으나 이후에는 지방정부로 존속하게 된다. 이때부터 집단남성분열시대가 시작되어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당나라 사신 파견 현황

모든 색상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일본사 P51에서

* 663...백강전투 672...진신전쟁

발해 ・ ・ ・ 698년 건립, 926년 멸망

다음은 중국 북동부, 발해 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인 북한입니다. 이다.

처음에는 당과 신라의 경쟁으로 인해 대표단이 파견되지만, 나중에 당과의 화해가 계획되면(성당 후기부터 중당 주변까지) 교류가 주요한 문화, 경제 교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 3국 중에서 가장 많은 교류를 가졌습니다.

일본측은 이 발해 사절단을 가지고 조공무역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이며, 점차 황실의 세금을 징수하기 어려워지는 국내 사정이 방해가 되어 사절단이 12년 동안 한국에 왔다. 이제 한 번만 제한할 수 있습니다.

공물거래는 공물을 받은 후 여러 선물을 보답할 의무가 있는 성격을 띤다.

신라 ・ ・ ・ 신라가 676년 한반도를 통일

67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와 당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676년 신라에서 당 정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통일 초기에는 일본과 당나라와 경쟁을 벌이려고 하는 등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도 이 무렵(670~690년대) 서쪽에서는 티베트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677년에는 티베트 제국(현재 티베트 왕국)과 서부 투르크계 카간(터키 유목민, 당)과도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북부에 위치해 있다. 그 일부(한때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가 통합되어 있는 상황이라, 틈이 꽤 있다고 할 수 있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신라와 당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동시에 발해측이 일본에 사자를 보냈고, 일본은 당과의 관계가 회복된 후에도 신라를 종속국으로 취급하려 함으로써 일본과 신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백제 ・ ・ ・ 660년에 멸종

고구려 ・ ・ ・ 668년에 멸종

당나라와 주변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빈도와 경로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660년까지는 백제와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북쪽 길을 갈 수 있었다. 그 후 당과 신라의 대결로 인해 신라측이 일본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여 북쪽 길로 당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665년과 669년 당 사신들이 백강해전의 패전을 처리하기 위해 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들이 신라로 가야만 했던 점 역시 북로로 나간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편에서 썼듯이, 이후 북로에서 다른 길로의 전환은 당나라를 배경으로 대등한 민족관계를 추구한 신라와 이전과 같은 대응을 추구한 일본 사이의 일이었다. 갈등이 심해져서 북쪽 길로 당나라로 가기가 어려워졌다.

당나라의 국력이 점차 쇠퇴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의 재정적 부담도 커져 위험할 정도로 당나라로부터 우수한 국내 인물을 확보할 필요가 적어졌다. 이것이 일본의 당대사가 폐지된 이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