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간무 천황은 왜 군단을 폐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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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무 천황의 정치 개혁 가운데 군단과 병사(兵士) 제도의 폐지에 대해 앞서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 폐지의 이유를 좀 더 깊이 조사하여 정리해 보았다.

간무 천황, 군단을 폐지하다

간무 천황에 의한 군단 폐지는 792년(엔랴쿠 11년)에 단행되었다. 다만 도호쿠(東北) 지방과 규슈(九州)에서는 군단이 폐지되지 않았는데, 도호쿠에서는 774년부터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십팔년 전쟁'으로 불리는 이 분쟁은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도호쿠가 완전히 진정된 것은 811년의 일이었다.

애초에 701년에 제정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아래에서 일본은 무력을 유지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다이호 율령 자체가 당·신라 연합군과의 백강 전투(白村江戰鬪) 대참패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병사를 모집해 편성한 군대는 일본 방어가 아니라 '대외 전쟁을 위해 창설된 군대'였던 셈이다. 대외 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군대의 규모는 필연적으로 매우 커야 했다. 따라서 율령제 초기에는 인구 대비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총 병력은 인구 약 600만~700만 명에 대해 약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일본 인구는 1억 2000만 명을 넘으므로, 당시의 비율을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하면 거의 400만 명의 자위대원에 해당하는 셈이다(실제 자위대 규모는 약 25만 명). 당시 군대가 얼마나 방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병제 축소가 가능했던 배경

그렇다면 어째서 대외 전쟁을 위해 존재했던 병력을 과감히 줄일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답을 찾으려면 일본만이 아니라 당나라의 상황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당나라에서는 755년부터 763년까지 대규모 반란인 안록산의 난(양귀비가 원인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이 일어났다. 당의 부도(副都)라 할 수 있는 낙양이 함락되고, 수도 장안마저 일시적으로 반군에게 제압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당은 위구르에 원군을 요청했고, 토번(吐蕃,티베트)은 혼란을 틈타 장안을 기습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그 결과 당 왕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주변 국가들은 이를 세력 확장의 기회로 삼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록산의 난 당시 일본에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정치의 중심에 있었는데, 반군이 일본까지 넘어올 가능성을 고려해 다자이후(大宰府)가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안록산의 난 이후 당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주변국과의 세력 관계가 재편되면서, 일본 역시 그토록 엄중하게 유지해 온 경계 태세를 다소 늦추어도 되는가 하는 판단이 서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조정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도호쿠 통치가 마무리될 때까지 병제를 축소하지 않고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병제 축소가 불가피했던 이유는 조정에게 더 이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지 정책 전환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이, 8세기 말 무렵에는 조(調)·용(庸) 수취의 부진, 납세 체납의 증가, 더 나아가 병사 질의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군단 폐지는 바로 그런 시점과 맞물린 개혁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더해 병사는 일반 백성이 부담하는 조세 중 조·용과 잡역이 면제되는 특혜를 받고 있었다. 조·용 수취가 이미 부진하고 질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다수의 백성을 면세 처리하는 것은 국가 재정에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부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내외 정세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간무 천황의 군단 폐지로 이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