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바산성 전투에서 숙적이었던 사이토 가문을 마침내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 이후 그는 천하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내딛게 됩니다.
이나바야마성 함락 후, 노부나가는 거점을 고마키산에서 이나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성과 성시(城下町)의 이름을 '이나바'에서 '기후(岐阜)'로 개명했습니다.
이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이 기산(岐山)에 도읍을 정해 천하를 평정했다는 일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또한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천하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천하부무(天下布武)' 인장을 사용하게 됩니다. * 이하 기후성이라 칭합니다.
거점을 기후성으로 옮긴 이유
그렇다면 왜 거점을 기후로 옮겼을까요?
기후성은 긴카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산성(山城)입니다. 일반적으로 산성은 물 확보가 어렵고 보급도 미리 쌓아둔 양에 한정되기 때문에 공성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성(支城) 등 주변 영지를 장악하고 있다면, 공격자가 성을 포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없어 오히려 함락되기 어려운 요새가 됩니다. 실제로 노부나가도 초기 미노 공략 당시 무리한 공격 끝에 패배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후성의 진정한 가치는 시야와 입지의 이점에 있습니다. 즉, 미노 전체를 하나의 성으로 보겠다는 구상인 셈입니다.
기후성은 산꼭대기 본환(本丸)에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산성입니다.
지금도 남쪽으로는 나고야 중심부에서 서쪽으로는 세키가하라까지 조망할 수 있어, 미노에 침입하는 적을 신속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환에서 바라보는 나가라가와
나고야 방면의 경관
건물과 주택이 들어선 지금도 이런 전망을 자랑합니다. 전국시대에는 더욱 탁 트인 경관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나가라가와와 기소가와의 위치도 절묘합니다. 두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적의 침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강을 건너오더라도 광활한 노비평야에서 반격할 수 있어 군세를 충분히 준비할 여유가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긴카산과 기후성은 본환, 기소가와와 나가라가와는 자연의 해자(堀), 그리고 광대한 노비평야와 함께 방어선을 이루는 천연의 요새인 셈입니다.
노부나가는 아마 이러한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해 기후로의 이전을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당시 전국 다이묘들은 거점을 최전선으로 옮겨 원정을 벌이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조차 에치고의 카스가야마성에 오래 머물렀기에, 간토에 출진해도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광대한 간토를 손에 넣은 호조 가문 역시 거처를 간토 서쪽 끝의 오다와라성에 두었습니다.
영지가 늘어나도 선조 대부터 물려받은 본거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전국 다이묘들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아즈치성 축성까지 약 10년간 노부나가는 기후성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상락(上洛)
-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 격파
-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으로 무로마치 막부 사실상 붕괴
-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대승
* 이 사건들은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아즈치성 축성에 이르게 됩니다.
아즈치성
1576년, 노부나가는 아즈치산에 지상 6층, 지하 1층, 높이 약 32m의 거대한 고층 건축물인 아즈치성을 축성합니다.
당시 목표는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과 주고쿠 지방 진출이었습니다.
동쪽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토미를 공략하고 있었으므로, 노부나가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1576년 당시 노부나가는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호쿠리쿠 지방 공략은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맡겼지만, 언제든 침공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시야마 혼간지도 여전히 건재했기에 에치젠 등지의 잇코잇키 경계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거점을 교토로 옮기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비와호 기슭의 아즈치에서 교토까지는 수로를 이용하면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거점을 교토로 옮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점을 교토로 옮기면 도카이 지방이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교토와 오와리 사이에 위치한 아즈치에서 양쪽 경제권을 모두 장악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당시 문헌들을 보면 아즈치성은 매우 화려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전투용 성이라면 화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공격해오는 적에게 표적이 될 뿐 역효과입니다.
축성 당시 오다 세력의 영향력은 이미 도카이 지방 이북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아즈치 주변은 거의 자신의 영토였습니다.
아마도 아즈치에서 싸울 일은 없다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군사적 성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이 강한 성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천수각을 세워 권위를 과시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노부나가의 천하가 된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 증거로 노부나가는 성 아래에서 스모 대회를 자주 열고, 성루를 조명으로 밝히며, 설날에는 입장료를 받고 본성을 관람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발상은 후에 히데요시에게 계승되어 화려한 오사카성과 주라쿠다이가 축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즈치성은 일본 최초의 근대적 성곽으로서 획기적인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즈치성 완공 불과 3년 만에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아즈치성은 결국 노부나가의 마지막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거점을 오사카로 옮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히데요시의 거처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 오사카로 거점을 옮기려던 의도를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천하부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거점을 더 적합한 곳으로 잇달아 옮겨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우리는 노부나가의 천하부무가 그려나갈 미래를 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노부나가가 그대로 천하통일을 이루었다면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지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