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
먼저 흔한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중화민국은 1929년이 아니라 191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2천여 년 제국 시대가 막을 내렸고, 이듬해 1월 1일 쑨원(손문)을 임시대통령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격변의 시기,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청년 마오쩌둥, 혁명의 문턱에 서다
1912년 당시 마오쩌둥은 만 18세의 청년이었습니다. 후난성 창사에서 신식 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신해혁명 소식을 접하고 잠시 혁명군에 입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베이징 대학 도서관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리다자오와 천두수 같은 초기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참고로 마오쩌둥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왔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프랑스에 근검유학을 떠난 것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이었으며, 마오쩌둥 본인은 끝내 중국을 떠나지 않고 후난성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국공합작의 붕괴와 상해 학살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뒤, 1924년부터는 국민당과 손을 잡는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 주도의 혁명 정부에 비교적 협조적이었지만, 양측의 이념적 갈등은 곧 표면으로 드러났습니다.
결정적 분기점은 1927년 4월 12일 찾아왔습니다. 장제스(장개석)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과 노동운동가들을 대규모로 숙청한 이른바 '상해 학살'(4·12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국공합작은 완전히 파탄났고, 20년 넘게 이어질 국공내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상해 학살 이후 마오쩌둥은 도시보다 농촌에 기반을 둔 무장투쟁 노선을 택해 후난성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는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하는 '대장정'을 감행하며 당 내 영향력을 굳건히 다졌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내전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1946년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재개되었습니다. 결국 1949년 공산당이 최종 승리를 거두었고, 마오쩌둥은 같은 해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갔으며, 그 분단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리
중화민국 건국(1912년) 당시 마오쩌둥은 아직 이름 없는 청년에 불과했지만,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해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상해 학살이라는 위기를 거치며 무장혁명 노선을 확립했습니다. 20여 년의 내전 끝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움으로써, 그는 중국 근현대사의 가장 강력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