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전국시대 다이묘와 가신의 관계, 절대 복종은 없었다

 

오닌의 난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풍조가 만연하면서, 수호 다이묘를 대신해 지방 통치를 맡던 수호대(守護代)나 국인(國人)들이 독립적인 전국다이묘로 성장하여 영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전국다이묘이 세운 영지는 '분국(分國)'이라 불렸고, 그 지배 체제는 분국 지배(分國支配)라고 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국다이묘의 영국 운영에 대한 이미지는 대략 이렇습니다.

  • 전국다이묘는 전제정치 아래 자신의 재량으로 영국을 운영했다
  • 가신들은 전국다이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 능력만 있다면 신분과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당시 사료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국시대 다이묘와 가신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국다이묘의 유형

출신 배경에 따라 전국다이묘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수호 다이묘에서 전국다이묘로 전환한 유형
  2. 수호대(守護代)에서 전국다이묘가 된 유형
  3. 국인(國人) 출신으로 다이묘가 된 유형

첫 번째 유형은 무로마치 막부의 수호 다이묘였던 집안이 그대로 세력을 이어간 경우입니다. 다케다 신겐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표적이며, 이들은 중신들의 의견을 회의에서 듣는 합의제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무능한 수호 다이묘를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한 수호대 출신입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우에스기 가문과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다이묘의 어리석음에 못 이겐 가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오우치 요시타카와 호소카와 하루모토처럼 가신의 손에 목숨을 잃은 다이묘도 있었습니다.

이 두 유형은 기존 수호 다이묘나 수호대가 어떤 형태로든 다이묘가 된 소위 '명문 다이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지역의 유력 무사, 즉 국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 다이묘가 된 경우로, 모리 모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표적입니다.

국인 출신 다이묘의 경우 중신들은 엄연히 부하였지만, 다이묘와의 관계가 거의 대등한 수준에 가까웠습니다. 중신 가운데 주군의 말을 직접 전달받는 자도 있었고, 명목상 대표권은 주군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인 영국 운영은 공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국다이묘는 전제 군주가 아니었다

유력 다이묘들 대부분은 재능 있는 '2인자'를 곁에 두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히데요시와 미쓰히데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는 나오에 카네츠구가 나라 운영을 맡았습니다. 이 시대는 에도시대처럼 신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이묘와 가신은 비교적 대등했고, 가신들은 주군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습니다.

아랫사람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대 기업보다 앞선 면도 있었던 셈입니다.

이렇듯 전국다이묘가 전제군주일 것이라는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독재를 일삼으면 배후에서 가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무장의 이직은 당연했고, 농민의 압박도 컸다

전국시대의 다이묘와 가신 관계는 주종 관계라기보다 현대의 노동 계약에 가까웠습니다. 가신은 다이묘에게서 록(祿, 봉록)을 받으며 계약을 맺었으므로, 공헌에 비해 보수가 적다고 판단되면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다이묘를 찾아 떠났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직입니다.

전국무장 토도 타카토라는 여러 차례 주군을 바꿔 '전국시대 이직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천하를 손에 넣은 히데요시 역시 노부나가를 섬기기 전에는 다른 가문의 가신이었습니다.

당시 무장들은 밤도망치듯 다른 다이묘 가문으로 떠나는 일이 흔했고, 받아들이는 쪽 다이묘도 이직을 방해하거나 잡아 처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직은 자유였지만 방해도 자유였던 것이죠.

적절한 평가를 하지 않으면 우수한 인재가 떠나기 때문에, 각 다이묘는 가신들이 만족할 만한 보상으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다케다 신겐조차 법도에 "결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명시했을 정도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단이 잘 다스려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잇코 잇키가 일어나면 잇키 편에 서서 이에야스를 몰아내려 하고, 히데요시가 권하면 곧바로 배신하고 따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가신들 입장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을 떠받쳐 왔다는 긍지가 있었겠죠.

반면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지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이에야스만이 아니라 당시 다이묘들이 상당한 스트레스 속에 나라를 다스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항의 위험은 가신만이 아니었습니다. 농민들도 주군에게 자주 반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연공(年貢)에 불만이 있으면 마을 전체가 농사를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연공을 걷지 못하면 다이묘에게는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다이묘는 대관(代官)을 통해 연공을 낮추겠다며 타협하고 돌아오라고 요청해야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강요하면 노동조합을 결성해 파업을 벌이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현대인도 그만한 기개가 있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 시대의 다이묘는 가신부터 농민까지 항상 주변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에도시대 다이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처우가 열악했습니다. 부하들이 아첨만 늘어놓으면 얕보이고, 능력이 없으면 도태됩니다. 실제로 전국다이묘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미움을 사면 노부나가처럼 살해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전국시대에 가신이 다이묘에게 절대 복종했다는 것은 허풍이었습니다.

당시 승진 개념을 바꾼 노부나가의 능력주의

히데요시의 이미지 때문일 수 있지만, 전국시대에는 능력만 있으면 끝없이 출세하여 천하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사례는 극히 드문 예외였습니다.

이 시대 다이묘 가문에서는 가신의 서열이 고정되어 있어, 출신이 미천하거나 외부에서 온 인물이 대대로 섬긴 중신(훗다이)들을 제치고 더 큰 권력을 잡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전공을 세우면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신참자에게 광대한 영토나 권한이 주어지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히데요시 같은 예외가 등장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단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혁신적인 방식 덕분에 미약한 나라에 불과했던 오다 가문이 천하통일의 문턱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눈앞의 높은 보수로 동기를 부여하는 외국계 기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부나가는 사람을 해고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섬긴 중신 사쿠마 노부모리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자 "죽거나 고야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거나 하라"는 압박을 받고 결국 고야산에 들어갔습니다. 역시 오다 가문은 블랙 기업인 걸까요? 반면 성과를 내면 출신을 불문하고 승진시켰으니, 어떤 의미로는 이 방식이 오히려 공정할지도 모릅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혼노지의 변에서 배신을 일으켰지만, 원래는 낭인 신세로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어 한 나라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노부나가의 혁신적인 영국 운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