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기존의 조세 징수와 토지 제도를 바꾼 태합검지(太閤検地)

장원·국(荘園国) 체제는 그동안 매우 복잡한 지배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에는 지토(地頭) 등에 의해 침식되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권한을 확대하며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 이후 전국 다이묘가 각지를 지배하게 되면서, 기존의 다층적인 토지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세 수취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세금을 정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면적과 생산량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검지(検地)입니다.

검지의 역사와 태합검지

검지를 처음 실시한 인물은 호조 소운(北条早雲)으로, 1506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검지는 주로 새로 획득한 영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가신들의 토지가 많은 기존 영지에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역시 영내에서 적극적으로 검지를 실시했습니다. 이후 노부나가의 정치를 이어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전국 규모의 검지를 추진합니다.

히데요시는 1582년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한 뒤, 야마자키 일대의 사찰과 신사에서 장부를 수집해 소유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인 검지를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태합(太閤)'이라 불리게 된 히데요시가 관여한 검지를 통칭하여 태합검지라고 합니다.

태합검지를 통해 경작자가 영주에게 연공(年貢)을 직접 납부하도록 하여, 중간에서 착취하던 복잡한 이해관계를 폐지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부상의 이야기였고, 농촌에는 여전히 다양한 권리 관계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주에게 제출할 장부 외에도 마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뒷장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태합검지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실시되었습니다.

생산량을 나타내는 간다카(貫高)처럼 돈으로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쌀의 양으로 생산량을 나타내는 코쿠다카(石高)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간다카와 코쿠다카가 함께 사용되었지만, 화폐 유통이 충분하지 않았고 정부가 화폐 가치를 보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다카는 폐지되었습니다.

이 코쿠다카는 쌀뿐만 아니라 다른 농산물·수산물, 심지어 토지의 가치까지 환산하여 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코쿠다카는 각 국(國)의 GDP를 나타내는 지표였으며, 군사력과 군역(軍役)의 규모까지 나타낼 수 있는 척도였습니다.

숫자의 단위도 통일되었습니다.

  • 6척3촌 = 1간(間, 약 191cm)
  • 1간 사방 = 1평(坪)
  • 30평 = 1무(畝)
  • 10무 = 1단(反)
  • 10단 = 1정(町)

논과 밭(田畑)은 상(上)·중(中)·하(下)·하하(下々)의 네 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측량에 사용된 용기는 교오와키(京枠)라 불리는 표준 자(枡)였습니다.

태합검지를 통해 막대한 토지가 측량되었지만, 항상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은닉전(隠田)도 적지 않았습니다.

에도 시대에도 검지는 계승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정권이 성립한 후인 1604년에는 모든 다이묘에게 검지를 명령했습니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신전 개발(新田開発)을 통해 석고를 늘리고 부를 축적하는 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장부상의 석고와 실제 석고 사이에 차이가 생겼고, 에도 시대 내내 검지가 자주 실시되었습니다.

태합검지는 그동안 복잡하게 얽혀 있던 지배·양여 관계를 단순화하고 새로운 토지 제도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검지는 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로, 다시 이에야스로 계승되며 새로운 토지 제도를 완성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