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배경이 화려하지 않았던 다이라 씨(平氏)가 태정대신 자리에 올랐고, 본래 섭관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지위마저 차지하면서 귀족 사회의 커다란 반감을 샀습니다. 앞서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과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관계를 다룰 때 언급했듯이, 여기에 헤이지의 난에서 신제이(信西)가 살해되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당시 귀족들 사이에는 "더 이상 가문이 절대적인 사회가 아니다"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력을 등에 업은 기요모리에 대해, 지쇼가타니 음모 사건(鹿ヶ谷の陰謀, 여러 설이 있음)처럼 다이라 씨를 공공연히 지지하기 어려웠던 인사들조차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품은 생각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다이라 씨를 무너뜨리면 어떤 이득을 얻거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득'과 '실'이 있었을까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로 알려진 화동개진(和同開珎), 즉 동전(靑銅貨幣)에 대해 학창 시절 배운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동전이 반(反)다이라 세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동전이 어떻게 다이라 씨의 몰락으로 이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화동개진 이전에도 화폐가 존재했지만, 넓은 지역에 걸쳐 실제로 유통된 일본 최고(最古)의 화폐는 화동개진입니다.
당시 구리 사용 실태와 경제 상황
화동개진은 708년에 화폐로 제정되었지만, 금속 제련 기술이 빈약하던 일본에서는 구리가 부족해 화폐의 질과 크기가 점점 작아졌고,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결국 화폐 경제에서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10세기의 연이은 재난과 11세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말법사상(末法思想)이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불교에서 찾게 되었고, 구리는 불구(佛具)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구리 부족은 한층 심각해졌습니다.
게다가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경제가 확대·발전하면서, 단순한 물물교환만으로는 거래하기 불편한 시대가 되어갔습니다.
'구리'에 주목한 다이라노 기요모리
당시 중국(송나라)에서는 이미 지폐가 등장한 상태였습니다. 지폐가 동전보다 가볍고 휴대하기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송나라에서는 동전을 예전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주목한 것이 바로 일송 무역(日宋貿易)과 다이라노 기요모리였습니다.
기요모리는 일송 무역을 통해 동전을 값싸게 대량 구매해 일본에서 비싸게 판매했습니다. 물론 동전을 녹여 불구를 만드는 용도도 있었지만, 화폐로 사용한다는 또 다른 활용 가치도 있었습니다. 기요모리는 이미 불편해진 비단 등의 물물교환 체계를 폐지하도록 조정(朝廷)에 진언해, 동전 경제로의 전환을 주도하게 됩니다.
애초에 돈이란 무엇인가?
'돈'은 신뢰로 성립합니다. 오늘날의 만엔권도 신용이 없다면 그저 종이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동전의 경우는 구리 그 자체의 가치가 신뢰를 받았습니다(불단을 만들려면 구리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덕분에 동전은 거래 결제 수단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기요모리는 동전 수입을 사실상 독점했습니다. 덕분에 헤이케는 오늘날 말하는 중앙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연히 헤이케가 보유한 자산은 어마어마해졌습니다.
문제는 동전이 널리 퍼지면서 수입량이 계속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 유입되자 구리의 가치가 떨어졌고,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화폐를 만드는 곳은 외국이었습니다.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유통량을 마음껏 조절할 수 없었고, 스스로 화폐를 발행할 수 없었기에 적시에 적절한 대응책을 취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원래 귀족들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비단 중심의 교환이었습니다. 장원(莊園)의 영주이기도 했으니 쌀 또한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전의 확산과 인플레이션은 비단과 쌀의 가치를 떨어뜨려 귀족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조정(朝廷)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공가(公家)가 다이라 씨에게 반기를 든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문의 자존심보다 재정적 피해가 더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셈입니다.
다이라 씨 외에 더 부유해진 곳은 어디일까?
동전의 확산으로 다이라 씨 외에 경제적으로 크게 부유해진 세력은 바로 사원과 신사(寺社) 세력입니다.
물론 그들이 부유해진 이유는 송나라 동전을 녹이는 등 대량의 구리를 확보해 불단과 불구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특성을 이용해 담보 없는 고리대금업까지 벌였다고 전해집니다. 흔히 이름이 거론되는 곳이 바로 엔랴쿠지(延曆寺)입니다. 아마도 고시라카와인과 엔랴쿠지의 관계가 소원했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도 한몫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