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내항 전부터 로주(老中)로서 막정을 주도해 온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막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이 개혁은 안세이 개혁(安政改革)이라 불리며, 막부의 3대 개혁으로 꼽히는 교호 개혁·간세이 개혁·덴포 개혁에 이은 대규모 개혁으로 평가받습니다.
개혁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서구 열강의 해상 위협으로부터 에도를 방어하기 위해 시나가와(品川)와 우라가(浦賀)에 포대를 축조하여 해안 방위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각 번이 실포탄을 사용한 포술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습니다.
나아가 유능한 외양(外樣) 다이묘의 막정 참여를 허용하고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체제를 마련했습니다. 전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등이 참여직(參與職)으로 기용되었으며, 막부 관료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처럼 아베 마사히로는 종래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막부 정치에서 발언권이 없던 외양 다이묘를 정무에 끌어들인 결과 막부의 권위는 오히려 실추되었고, 이 개혁은 훗날 막부 체제 자체를 흔드는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1854년, 페리가 재차 내항하여 국서에 대한 명확한 회답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이 압력에 굴복하여 같은 해 3월 신미화약(日米和親条約)을 체결하게 됩니다.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관련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856년에는 미국 총영사로 임명된 타운센드 해리스가 일본에 부임하여 통상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당시 대로(大老)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고메이 천황과 수많은 반대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에 조인하고 말았습니다.
제14대 쇼군 계승 문제와 안세이 대옥(安政大獄)
열강과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가운데, 후사 없이 병약했던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계승 문제가 대두됩니다.
유력한 다이묘들은 오랫동안 유능함을 인정받아 온 히토쓰바시 가문의 요시노부(慶喜)를 추천했고, 이이 가문을 중심으로 한 보신(譜代) 다이묘들은 기슈 번주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를 밀었습니다. 이 대립은 곧 개혁파와 보수적 도쿠가와 독재 세력 간의 구도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이 나오스케의 단독 조약 체결은 히토쓰바시파 다이묘들과 고메이 천황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나오스케는 강경한 태도로 이를 밀어붙여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차기 쇼군으로 확정하고, 이 방식을 비판하는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858년의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입니다.
이 탄압으로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했던 히토쓰바시파 인사 다수가 근신(蟄居)·은거, 심지어 사형이라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영구 근신에 처해졌고, 요시다 쇼인과 하시모토 사나이 같은 지사들이 처형되는 등 그 피해는 무가뿐만 아니라 공가와 낭인, 서민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페리 내항으로 시작된 개국은 막부 지배 체제를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새로운 대립 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결국 정치 구도는 점차 공무합체파와 존왕양이파의 대립으로 변모해 갔으며, 이는 곧 막말 혼란의 서막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