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이 대옥과 이이 나오스케의 강경 정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통상 조약을 독단으로 체결하고 장군 계승 문제를 강압적으로 처리하면서, 히토츠바시파를 비롯한 친번(親藩)·외직(外様) 다이묘들의 반발은 물론 존왕파와 양이파 양측의 격렬한 반대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반발 여론이 조정(황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불안해진 나오스케는 1858년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말입니다.
히토츠바시파를 지지했던 번주들뿐 아니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우메다 운핀(梅田雲浜), 라이 미키사부로(頼三樹三郎) 등도 이때 처벌을 받았으며, 존왕파 학자와 지사들 역시 예외 없이 탄압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
이 탄압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세력은 미토번 출신 하급 무사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번을 이탈해 낭인이 되었고, 막부와의 충돌을 피하려던 번 내 상급 무사 그룹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후 사쓰마번과 긴밀히 접촉하며 이이 나오스케 암살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1860년 3월, 에도성 사쿠라다문 부근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습격당해 목숨을 잃습니다. 당일 폭설로 시야가 크게 나빴고 호위병들이 제설 작업에 한창이었다는 점은 습격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나오스케가 탄 가고(駕籠)를 메던 인부들은 즉시 자리를 떴다고 전해지며, 나오스케는 습격이 시작된 지 몇 분 만에 참수당했습니다.
국정을 총괄하던 최고위 로주가 암살당하는 이례적인 사태 속에서 로주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가 후임으로 나섰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흔들리는 막부의 권위 회복이었습니다.
이에 안도는 조정과의 협력 노선을 모색했습니다. 우선 천황의 권위를 활용해 반막부 세력을 억누르는 방안을 택했습니다.
구체적인 조치로는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카즈노미야(和宮)를 쇼군 이에모치(家茂)의 정실로 삼아 조정과 막부의 화해를 도모하는 공무합체(公武合体)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두 번째 로주 습격, 사카시타문 밖의 변(坂下門外の変)
이 공무합체 구상은 처음에 고메이 천황과 카즈노미야 본인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천황의 측근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조정 권력 회복을 노리게 되었고, 천황의 생각 역시 공무합체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사쿠라다문 밖의 변 7개월 후, 카즈노미야는 배이(攘夷) 단행을 조건으로 이에모치와의 혼인을 수락했습니다.
막부는 이 공무합체 정책으로 존왕운동을 억누르려 했지만, 정략결혼이 오히려 조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으면서 존왕운동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62년, 두 번째 로주 습격 사건이 발생합니다.
범인은 미토번 낭인들이 이끄는 존왕파 지사들이었습니다. 로주였던 안도 노부마사는 에도성 사카시타문 근처에서 습격당했습니다. 다행히 안도는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과 사카시타문 밖의 변 — 막부 최고 권력자가 연달아 두 차례나 습격당한 사건은 막부 권위 상실을 천하에 알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막부의 권위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카시타문 밖의 변의 피해자였던 안도 노부마사는 이 소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고, 조정 업무에 적극적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 역시 함께 파면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외국인이 존왕파 지사들에게 습격당하는 천벌(天誅) 암살 사건과 같은 테러 행위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