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대일본제국헌법과 제국의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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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메이지 14년) 메이지 정부는 국회 개설의 칙유를 발표하여 국민에게 의회 개설을 약속했으며, 동시에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같은 해 메이지 14년 정변을 거친 뒤, 188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유럽에 파견하여 각국의 헌법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빈의 슈타인, 베를린의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에게 사사하며 군주 권한이 강한 독일(프로이센)식 헌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독일을 본떠 만든 입헌군주제

1884년 정부는 화족령을 반포하여 귀족원(상원)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듬해인 1885년에는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제를 확립했습니다. 내각은 천황에 속하는 기관으로, 총리대신과 각 성(省)을 담당하는 국무대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며, 국무대신은 주로 사쓰마·조슈 번 출신 인물들이 맡았습니다. 이러한 내각제는 정부 기구를 강화하고 행정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궁정(궁중)과 정치를 분리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내각이나 궁내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내대신직이 설치되었고, 초대 내대신에는 산조 사네토미가 취임하여 천황 보좌 임무를 맡았습니다. 원래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자리였지만, 천황의 측근으로서 점차 큰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황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대일본제국헌법

내각제에 이어 관료제와 지방 제도까지 정비된 후, 이토 히로부미는 본격적으로 헌법 기초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노우에 다케시(井上毅),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 등이 독일 법학자 뢰슬러(Hermann Roesler)의 조언을 받아 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이 초안은 추밀원의 심의를 거쳐 1889년(메이지 22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반포되었습니다.

뢰슬러는 외무성 고문으로 일본에 온 뒤 내각 고문이 된 오야토이 가이코쿠진(お雇い外国人)입니다. 그는 헌법 제정 준비에 참여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군주 권한이 강한 독일식 입헌제에 대한 조언을 했습니다.

1887년 뢰슬러가 제출한 헌법 초안의 대부분이 채택되어 대일본제국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헌법 제정뿐 아니라 민법·상법 제정에도 기여하며, 일본이 근대 국가로 출발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천황의 권한

이렇게 하여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 헌법이 탄생했습니다. 이 헌법은 천황이 신민에게 헌법을 부여한다는 흠정헌법(欽定憲法)의 원칙*에 따라 반포되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천황에게 극도로 강한 권한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신성(神聖)에 불가침으로 규정된 천황은 주권의 모든 권능을 쥐었으며, 문무관의 임면, 육해군의 통수권, 선전과 강화, 조약 체결 등 의회가 개입할 수 없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 흠정헌법이란? 군주 주권에 바탕을 두고 군주가 스스로 제정한 헌법을 말합니다. 일본의 대일본제국헌법이 대표적이며, 외국의 예로는 프랑스에서 루이 18세가 제정한 헌장(1814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육해군의 통수권은 내각과는 독립적으로 천황에게 속했습니다(통수권 독립). 또한 내각은 천황을 보필(보좌·진언)하는 기관으로 위치 지워졌으며, 오로지 천황에게만 책임을 졌습니다.

천황의 명령(칙명)은 메이지 헌법 아래 천황의 막강한 권력 중 하나로, 육해군의 최고 통수, 군대 편성, 근무 규칙 제정, 인사와 직무 결정, 출동·징집 명령, 작전 계획 수립 등 군에 대한 각종 명령과 지시를 포함했습니다.

제국의회

메이지 헌법의 또 다른 특징은 의회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제국의회는 서로 대등한 권한을 가진 중의원(하원)과 귀족원(상원) 두 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890년 중의원 선거법에 따라 제1회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 자유민권운동 계열의 반정부 정당인 입헌자유탕과 입헌개진당 등 민당(民黨)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정당은 민당(民黨),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리당(吏黨)이라 불렸는데, 일본 최초의 총선거 결과는 반정부 세력인 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정부는 이미 제국헌법을 반포한 상태였기에, 쿠로다 기요타카(黑田清隆) 총리는 정부의 시책은 일정한 방향을 가지며 정당의 존재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소위 초연주의(超然主義) 노선을 표명했습니다.

이후 정부와 중의원은 청일전쟁 직전의 제6회 의회까지 충돌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민당이던 자유탕은 점차 정부에 접근하여 사실상 여당화되었고, 정부를 공격해 온 개진당 역시 침략적 외교 노선을 내세우면서 러일전쟁이 다가오자 정부와의 거리를 좁혀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