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메이지(明治) 연호가 시작된 지 1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시대는 큰 전환점에 선 매우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메이지 천황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메이지 천황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메이지 천황의 즉위
메이지 천황은 에도 시대 말기인 1866년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이 붕어하자, 이듬해인 1867년 14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소년이 에도 막부 말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새 정부의 중심에 서야 했으니, 상상하기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합니다. 이로써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천황과 조정이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대정봉환과 왕정복고의 차이
막부가 갑작스럽게 정권을 조정에 반납한 대정봉환 당시, 천황 측은 즉각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부 체제가 갖춰질 때까지는 구 막부 세력이 실무를 계속 담당하게 됩니다.
약 1년 뒤인 1868년, 비로소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 발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1867년의 대정봉환과 1868년의 왕정복고 대호령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 도쿠가와 막부가 조정에 정권을 반납한 것 → 대정봉환
- 조정이 공경(公卿)과 천하에 발포한 것 → 왕정복고의 대호령
'막부'는 원래 천황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하던 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돌려주는 상대는 천황이라는 점을 짚어두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며 정세는 급격히 변화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흔들림 없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막부 세력을 유지하려던 도쿠가와 요시노부
메이지 초기에도 에도 막부는 형식상으로는 남아 있었습니다.
정권을 조정에 반납하면 타도할 명분이 없어진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많은 무가(武家)가 책임을 물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죠. 요시노부는 "막부라는 조직은 없애되, 도쿠가와 가문은 새 체제의 맹주로 살아남아 도쿠가와 중심의 의회를 만들자"라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름만 바꾼 사실상 같은 조직을 만들려 한 것입니다. 조직을 없앤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발상이었죠.
그러나 요시노부의 속셈은 공의파에게 숨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배제하는 방침을 세웁니다.
그 출발점으로 관직 사퇴와 영지 반납을 요구합니다. 이런 강경한 조치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요시노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사카 성으로 옮겨 공의파의 동향을 살폈습니다. 다른 다이묘들도 영지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볼 뿐 요시노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즉시 움직인 것은 무사파뿐이었습니다.
보신 전쟁 종결 전 잇따라 발포된 새 정책
도쿠가와 막부가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본 다이묘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공의파와의 대립을 강화합니다. 요시노부는 어떻게든 다이묘들을 달래지만,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보신 전쟁(戊辰戦争)이 시작됩니다.
메이지 천황 입장에서 이 전쟁은 본의가 아니었지만, 공의파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장비와 병력 면에서 구 막부군이 우세해 보였지만, 점차 신정부군이 우세해집니다.
바로 이 전쟁 중에 메이지 천황은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 오개조의 어서문(五箇条の御誓文)
- 오방의 게시(五榜の掲示)
-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1세 1원(一世一元)제 실시
- 수도를 도쿄로 옮기는 작업(준비)
이러한 일련의 제도 개혁과 서양화를 포함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 부릅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는 천황이 정치를 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강해진다"는 메시지가 확실히 각인됩니다.
아울러 메이지 천황의 체력 단련의 일환으로, 천황 스스로 전문 사범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천황이 무술에 관심을 가져도 막부의 눈총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변화입니다.
새 정부의 중요한 업무, 외국 요인과의 회견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메이지 천황에게는 새로운 업무가 늘어납니다.
그중에서도 외국 요인과의 회견은 특히 중요했습니다. 메이지 12년(1879년)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전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로부터 국제적 인정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처음에 메이지 천황은 무술과 학문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정무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시찰 때 서양 군주들을 목격하고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자주 충돌했다고 합니다.
이토는 천황이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규정을 마련했고, "이런 경우에는 천황 스스로 정무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문서에 명시했습니다.
천황이 적극적으로 정무에 참여하면서 책임감과 관심도 함께 커졌고, 내각 방문도 잦아졌습니다. 메이지 헌법과 황실전범 심의 때는 거의 모든 회의에 참석했으며, 회의 후에는 이토를 불러 설명을 요청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으로 명확해진 천황의 지위
메이지 22년(1889년), 메이지 헌법(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면서 천황의 지위가 명확해집니다.
"천황의 지위는 신성하여 침해받지 않으나, 막중한 권력과 의무를 진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가 자신의 정치적 역할이라고 생각했는지, 헌법 반포 후에는 정치에 크게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인사 문제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기본적으로 내각이나 측근들의 의견을 일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훗날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청일전쟁 때였습니다. 천황은 이세 신궁과 고메이 천황의 능에 사자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고, 궁중 삼전(宮中三殿)의 봉고제(奉告祭)*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 봉고제는 메이지 천황에게 "조상에게 보고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메이지 천황은 "이 전쟁은 본의가 아니므로 조상에게 보고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시작된 이상 직무였는지, 아니면 병사와 국민에게 방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지, 히로시마에 대본영이 설치되자 한동안 머물며 정무와 군무에 매진했습니다.
마무리
에도 시대 말기의 격동 속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메이지 6년(1873년)의 정변, 메이지 14년(1881년)의 정변 등 갈등이 격렬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기반으로 근대 일본 건설의 올바른 길을 흔들림 없이 설정해 나간 것은 메이지 천황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