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전국으로 확산된 국회 개원 요구

무사 계급의 권리를 추구하던 자유민권운동은 한때 주춤했지만,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다시 불타올라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지주와 도시 상공업자 등 지역 유력자들까지 참여시키며 운동의 기반을 넓혀 나갔습니다.

정부 내분으로 촉발된 메이지 14년의 정변

정치결사 애국공당은 1880년 국회기성동맹으로 개명하고, 가타오카 겐키치와 고노 히로나카 등을 대표로 하여 국회 개원 청원서를 제출하며 의회의 즉각적인 개설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탄압에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각지에서 국회 설립을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가 원로원에 제출되었습니다.

한편, 1875년 '점진적 입헌정체 수립의 칙서'를 통해 입헌정치로의 전환을 선언했던 정부 역시 정부 주도의 입헌정치 실현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최고 실력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를 잃고 내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삿초(薩長)번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히젠(사가) 출신의 오쿠마 시게노부는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 영국식 의원내각제 모델의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와쿠라 도모미와 이토 히로부미 등 삿초파는 군주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식 정치체제를 내세우며 맞섰습니다.

바로 그 무렵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부에 대한 공격과 국회 개설 요구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사쓰마번 출신인 구로다 기요타카는 홋카이도 개척사의 정부 자산을 같은 번 출신 정치사업가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부당하게 낮은 가격에 매각하려 했습니다.

오쿠마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판단한 정부는 1881년(메이지 14년) 오쿠마 시게노부를 축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 14년의 정변입니다.

동시에 정부는 국회 개설의 칙령을 발표하여 1890년까지 의회를 개설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격렬한 정치 비판을 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메이지 14년의 정변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삿초 번벌 정치가 확립되었으며, 강력한 군주권을 지닌 입헌군주제를 향한 정부 주도의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정당 결성과 사인 헌법(私擬憲法) 열풍

국회 개설 칙령 발표 직후, 국회기성동맹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속속 탄생했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지도자가 되어 프랑스식 급진주의를 표방한 것이 자유당입니다. 이 정당은 주권재민과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급진 학자들과 호농(豪農)을 주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면 정부의 추궁을 받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입헌개진당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며, 주로 도시 상공업자와 지식인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정당들에 맞서 여당 형태로 결성된 것이 입헌제정당입니다. 후쿠치 게이치로가 중심 역할을 맡아 보수주의와 주권재군을 내세웠지만, 민권파와 대항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1883년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국회 개설의 칙령은 국민들의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사인 헌법(私擬憲法), 즉 민간인이 스스로 작성한 헌법 초안이 활발히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자유민권운동의 결과물인 동시에,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정부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국회 개설을 약속함으로써 온건파를 회유하고, 급진파와의 분열로 운동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급진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정부의 억압과 통제책에 더해 마쓰카타 재정으로 인한 불황까지 겹치면서 자유당 하층 당원들 일부는 고리대금업자와 경찰을 습격하는 지치부 사건으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경제 불황이 초래한 지치부 사건

정부의 탄압과 통제 정책, 그리고 마쓰카타 재정으로 인한 불황 속에서 일부 자유당원들과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은 곤민당(困民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사건이 1884년의 지치부 사건입니다.

지치부 지역은 양잠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지만, 불황으로 인해 빚을 지고 토지와 가재도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채무 상환 유예 운동과 자유당의 급진파 움직임이 점차 과격해지면서, 농민 중심의 곤민당은 고리대금업자들을 습격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군대가 출동하여 폭동은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자유민권운동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