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부농·상인까지 참여한 일본의 국민운동, '자유민권운동'

1874년(메이지 7년) 1월, 정한론을 내세우며 정부와 갈등을 빚어오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은 「민선의원 설립 백서(民選議員設立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 자유민권운동의 시발점

이 백서는 정부 관료들의 전횡(專橫)을 강하게 비판하고, 공의정체(公議政體)에 기반한 민선의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개설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서가 신문에 게재되자 여론은 술렁였고, 이것이 바로 자유민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백서 제출을 계기로 자유민권과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고치에서 립지사(立志社)를 결성했고, 이어 같은 뜻을 지닌 정치결사들이 각지에서 잇달아 조직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민권운동을 한층 확산시키기 위해 립지사는 전국 단위의 정치결사인 애국사(愛國社) 창설을 호소했습니다. 아울러 자유민권론을 다루는 신문과 잡지가 우후죽순처럼 창간되면서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오사카 회의와 정부의 대응

사족의 반란과 농민 일극(一揆)으로 정부가 궁지에 몰려 있던 상황에서, 격화되는 민권운동에 대해 정부는 온건한 대응책을 택했습니다. 1875년 내무경(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 대만 출병 문제로 정부와 대립하던 기도 다카요시, 그리고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만나는 삼자 회담이 실현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사카 회의(大阪会議)입니다.

이 회의에서는 기도의 의견에 따라 국회 개설을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도와 이타가키는 다시 참의(參議)로 복귀했으며, 같은 해 정부는 「입헌정체 점차 성립의 조유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곧 통제 조치에 나섰습니다. 조유서 발표 약 두 달 뒤, 정부는 신문·잡지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법령(신문지조례)을 제정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와 오쿠보 독재 체제의 지속에 반발한 이타가키와 기도는 다시 정부를 떠났습니다.

한편, 민권운동의 중심이던 립지사는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이 한창이던 시기에 의회 설립을 요청하는 건의문(립지사 건백서)을 천황에게 올리고자 했으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운동은 점차 침체에 빠졌습니다.

새로운 민권운동의 시작

침체에 빠졌던 민권운동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1878년 립지사가 중심이 되어 해체 상태에 있던 애국사를 재건했고, 이를 계기로 민권운동은 전국적으로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부흥은 이전 운동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백서 제출로 시작된 민권운동은 처음에는 무사(사족) 중심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침체 이후의 운동에서는 부농(豪農)과 상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참여로 운동은 무사 중심에서 벗어나, 지주·농민과 자유로운 상공업 발전을 추구하는 세력이 주축이 된 전국적 운동으로 변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론에서 비롯된 무사들의 반란이 무사 계급 안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자유민권운동은 지조개정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민중과 결합하면서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전개된 자유민권운동은 1880년 국회기성동맹(國會期成同盟) 결성, 1881년 자유당(自由黨) 창당, 1884년 치치부 사건(秩父事件) 등 여러 국면을 거치며 다양한 요소를 품은 커다란 정치적 흐름으로 성장해, 18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