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와키사카 야스하루] 인생의 선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일곱 개의 창을 든 무장!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후 오다 가문의 가신들은 시바타 카츠이에파와 하시바 히데요시파로 나뉘어 '시즈가타케 전투'를 벌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천하 통일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젊은 가신들 역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일곱 명의 무장을 바로 '시즈가타케 치장(七本槍)'이라 부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일곱 개의 창 중 최연장자인 와키사카 야스하루를 소개합니다. 이 시대의 무장들은 관원의 합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와키사카 가문과 담비 가죽!?


1554년, 와키사카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오미국의 와키사카(현재 시가현) 출신으로, 성씨 또한 이 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20세 무렵에는 아자이 나가마사를 섬겼으나, 1573년 아자이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하자 오다 가문의 가신이 되어 아케치 미츠히데 밑에서 섬기게 됩니다.


참고로 아자이 나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이 된 '아자이 자매'의 아버지입니다. 게다가 나가마사의 아내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니,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죠.


나가마사와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노부나가가 이를 깨버렸습니다. 역시 '마왕'이라 불릴 만합니다.


붉은 귀신에게 받은 담비 가죽 창집!?


[와키사카 야스하루] 인생의 선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일곱 개의 창을 든 무장!

22세 무렵, 아케치 미츠히데를 섬기며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단바국(현재 효고현) 정벌에 나섭니다.


그러나 적장인 아카이 나오마사는 '악 우에몬', '단바의 붉은 귀신'이라 불리는 강적이었습니다. 미츠히데는 "더 이상은 안 된다!"라며 여러 차례 패전 끝에 결전을 준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단바 공략 2년 반 후, 나오마사가 50세의 나이로 급병으로 사망하고, 지휘관을 잃은 아카이 군은 함락되어 오다 군이 승리했습니다.


'단바의 붉은 귀신'이 죽기 직전, 야스하루는 항복 권고 사자로 단신 적성에 들어갔고, 붉은 귀신은 이 완강한 청년에게 가보인 '담비 가죽 창집(槍鞘)'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마지루시(馬印)', 즉 전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깃발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와키사카 가문은 이 '담비 가죽 창집'을 마표로 사용했으며,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에도 시대의 담비 가죽!


에도 시대 후반, 야스하루로부터 10대째 되는 와키사카 야스토모는 하리마 다쓰노번(현재 효고현)의 8대 번주로서, 에도 막부의 '로주(老中)' 직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


와키사카 가문은 관원의 합전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손을 잡은 '외양 다이묘(外様大名)'였기에 중요한 직위에 오르기 어려웠지만, 야스토모의 뛰어난 인품 덕분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눈에 들어 '지샤봉행(寺社奉行)'에 기용됩니다.


지샤봉행이 된 야스토모는 명판결로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자신의 첩 문제로 한 번 물러나긴 했지만...


16년 후, 무려 다시 지샤봉행으로 선임됩니다! 당시 사찰과 신사 관계자들은 그의 재등장에 벌벌 떨었다고 하며,


"다시 나오니 담비 가죽이 놀랍구나"


라는 낙수(落首), 즉 풍자시가 유통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의 시대상 차이를 재미있게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시절


[와키사카 야스하루] 인생의 선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일곱 개의 창을 든 무장!

환위 문장(輪違紋)의 유래!


20대 초반부터 이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그는, 붉은 귀신 정벌과 담비 가죽 이야기 당시에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578년, 25세 무렵 하리마국 미키성 공격 당시 '환위 문장(와치가이몬)'을 새긴 붉은 호로(母衣)를 하사받았고, 이후 이것이 가문의 문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호로란 화살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등에 부풀려 메는 갑옷의 일종입니다.


"혼자 사는 것은 어렵다. 우리 손을 잡고 함께 살자."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전해집니다.


시즈가타케 치장의 하나!


28세 무렵,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자결합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오다 가문을 양분한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 사이에서 '시즈가타케 전투'가 발발합니다. 이 전투에서 야스하루를 포함한 히데요시의 젊은 가신들이 큰 역할을 했으며, 그중 무공을 세운 일곱 명이 바로 '시즈가타케 치장'입니다.


야스하루는 야마시로국(현재 교토 남부)에서 3,000석을 받았으며, 치장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의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해군을 지휘한 '규슈 평정', '오다와라 공성전', 그리고 '조선 출병'을 거치며 아와지국 스모토(현재 효고현)의 3만 3,000석 다이묘로 계속 올라섭니다.


2004년 제작된 한국 드라마에서는 '일본군 최강'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치장의 한 명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와키사카와 같은 줄에 서는 것이 거슬린다"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관원의 합전, 서군에서 동군으로!?


관원의 합전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합니다. 1600년, 45세 무렵 천하의 주도권을 건 '관원의 합전'이 벌어집니다.


야스하루는 이 무렵 이에야스와 친밀했기에 동군 측에 설 생각으로 오사카에 머물렀지만, 오사카 체류 중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붙잡혀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정벌에 나선 틈에 아들 와키사카 야스모토를 지휘하려 했으나 미츠나리에게 방해받은 것입니다.


관원의 합전에서는 적과 내통했다는 소문이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곁에 구쓰키 모토쓰나,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자 나오야스와 함께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돌아서자 야스하루를 포함한 세 장수도 함께 배신했습니다.


이것이 관원의 합전의 승패를 갈랐습니다.


야스하루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하던 대로의 행보였기에, 전후 영지가 안도(安堵)되었습니다. 반면 다른 세 장수는 배신으로 간주되어 영지 몰수 등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히데아키는 전투 2년 후 21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습니다. 배신으로 인해 세상의 냉대를 받으며... 돌아서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오사카 진압 이후의 만년


[와키사카 야스하루] 인생의 선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일곱 개의 창을 든 무장!

1609년, 54세 무렵 이요 오즈번(현재 에히메현)으로 5만 3,500석을 받아 영지를 옮깁니다.


5년 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 진압'이 벌어졌을 때는 아들 와키사카 야스모토가 도쿠가와 측으로 무공을 세웁니다.


같은 해 야스하루는 가독을 야스모토에게 물려주고, 1626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와키사카 가문은 후사가 끊기는 위기를 겪었지만, 막부 로주였던 호타 마사모리에게 부탁하여 그의 차남을 양자로 맞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덕분에 와키사카 가문은 막부와 가까운 가문이 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정리


이번 글에서는 시즈가타케 치장의 하나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활약한 와키사카 야스하루를 소개했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만큼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사람"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본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