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메이지 신정부를 둘로 찢은 '정한론' 논쟁

1873년(메이지 6년), 일본 외무성은 조선 문제에 관한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그 내용이란 조선의 무례함을 무력으로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건이 도화선이 되어 신생 메이지 정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정한론 논쟁입니다.
정한론이 조선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 '무례함'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일본과 조선의 국교는 1811년 이후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뒤, 대마도의 소씨(宗氏)를 통해 조선에 접근하여 통상조약 체결을 타진했지만,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던 조선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외무성 고위 관료를 파견하여 직접 교섭을 시도했으나, 조선 측은 강요에 가까운 요구라 판단해 응하지 않았습니다. 조선과의 국교 수립은 당시 일본에게 가장 중대한 현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선 내부에서 배일 사건이 발생하자, 이와쿠라 사절단 부재 중 정무를 맡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등으로 구성된 유수 정부(留守政府)는 일제히 정한론으로 기울게 됩니다.

유수 정부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결정하고, 사이고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해 조선에 파견하기로 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와쿠라 도모미 등 사절단은 급히 귀국하여, 조선에 대한 무력 행동보다 내정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며 정한론을 저지하는 데 나섰습니다. 그 결과 사이고 등 참의들과 오쿠보 등 참의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각의(閣議)에서 결정까지 마친 조선 공사 파견안에 대해, 이와쿠라 도모미는 공사 파견을 연기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서를 천황에게 직접 올렸습니다. 그 결과 조선 공사 파견은 연기되기로 결정됩니다.

이와쿠라·오쿠보 파가 궁중에서 벌인 공작 끝에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논쟁에서 패한 사이고 등 정한론파는 일제히 하야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 정한론 정변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이고 등이 물러난 뒤, 오쿠보는 내무성을 설립하고 내무경으로서 독재적으로 정부 체제를 굳건히 다져갔습니다.

정한론의 쟁점은 어디에 있었나?

정한론은 신정부를 찢어놓았지만, 쟁점은 단순히 '정복할 것인가, 내치에 힘쓸 것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쿠보 등 내치파는 정한론 자체에 반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은가?"라며 시기를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먼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확립해 국가 기반을 다지고, 군대와 경찰 조직을 정비하며, 산업을 진흥시켜 국력을 키운 뒤에야 비로소 대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즉, 정한론 논쟁은 정복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실현 방법을 두고 벌인 다툼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이고 등이 조선 출발을 앞두고 정변이 일어났을까요?

논쟁에서 패배해 정부를 떠난 정한론파의 대다수는 군인 출신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이고 등 정한론파는 근대화 정책으로 특권을 빼앗긴 불평 사족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려 했습니다. 정한론파가 내세운 정한론은 1차적 목적이 조선 침략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몰락한 무사들의 불만을 내전으로 번지게 하지 않고 대외 전쟁으로 돌려 무사들에게 생존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의도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내치파의 기본 노선은 불평 사족의 반발을 억누르더라도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논쟁에서 패한 사이고는 다시는 정부의 일원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도쿄 땅에는 발길조cnt 들이지 않았습니다.

훗날 무사들을 구원하지 못한 사이고는 역사상 최대의 내전인 세이난 전쟁(사쓰마 반란)으로 나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