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으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구 무사(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하나둘씩 박탈해 나갔습니다.
또한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했던 일부 무사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새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지 않자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무사들의 불만과 사가의 난
1873년, 정한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등 정한론파 인사들이 일제히 정계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 소장을 비롯한 육·해군 장교들도 대거 가고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무사 계급의 불만을 배경으로 한 신정부에 대한 반발이 각지에서 커져 갔습니다.
무력 충돌의 시작은 사가의 난(佐賀の乱)이었습니다.
사가로 돌아가 정한론파의 지도자가 된 에토 신페이는 불만을 품은 무사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약 12,000명의 무사들이 봉기하여 사가 현청을 점거했지만,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지휘하는 신정부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특권 박탈이 가져온 무사들의 궁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신정부는 무사의 특권을 더욱 적극적으로 폐지해 나갔습니다.
폐번치현(廃藩置県) 이후 사실상 해체되었던 가록(家禄) 제도는, 화족과 사족에게 지급되던 가록을 몇 년 치에 해당하는 공채(公債)로 일괄 지급하는 금록처분(金禄処分)으로 완전히 청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처분에서 화족의 평균 수령액이 약 64,000엔인 반면, 사족은 5,000엔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생계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 많은 무사들이 경제적 궁지에 몰렸습니다.
여기에 신정부는 폐도령(廃刀令)까지 발표합니다.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도검 소지가 금지되면서, 무사의 혼이라 불리던 검마저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1876년 10월, 이 폐도령을 직접적인 계기로 구마모토에서 경신파의 난(敬神党の乱)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동은 후쿠오카의 아키즈키의 난, 야마구치의 하기의 난으로 이어졌지만, 두 반란 모두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세이난 전쟁, 일본 최후의 내전
1877년, 구 번사들이 사이고를 영수로 추대하며 거병하면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사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즉 사쓰마 반란입니다.
지금까지 각지에서 일어났던 무사 반란들과 달리, 사이고가 이끄는 군대는 포병대를 갖춘 본격적인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징병제를 통해 근대 국민군으로 재탄생한 신정부군 앞에서 사이고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다바루자카 전투, 17일간의 격전
세이난 전쟁의 최대 격전지는 다바루자카 전투(田原坂の戦い)였습니다. 사이고군은 다바루자카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선전했지만, 신정부군 정예부대의 공세 앞에 단 17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의 참혹함은 당시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 상세히 보도될 정도였습니다. 신정부군이 하루에 35만 발의 탄약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격전지에서는 공중에서 서로 부딪혀 합쳐진 '충돌탄'이 다수 발견되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시로야마에서 끝난 사이고 다카모리
전투는 규슈 남부 전역으로 확대되었지만, 사이고군은 연패를 거듭하다 마침내 가고시마 시로야마(城山)에 불과 300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부군의 총공격을 받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일본 최대의 무사 반란인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가 패배하면서, 무사들에 의한 무력 저항은 급속히 잦아들었습니다. 전쟁 이후 일어난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사건(기순의 변)을 끝으로 무사 반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고, 메이지 유신은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