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소금으로 번을 살린 명군, 마쓰다이라 요리히로의 산업 진흥 이야기

에도 시대의 통치 구조는 막번(幕藩) 체제였습니다. 막부가 중앙 집권을 담당하는 한편, 각 번은 사실상 지방 자치를 수행했는데요. 당시 번의 자치에는 오늘날과 같은 보조금이나 지방 교부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번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스스로 특산물을 육성해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명군(名君)'이라 불리는 영주란 단순히 인품이 뛰어난 군주만이 아니라, 번의 재정을 풍요롭게 만든 군주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산유키 다카마쓰 번의 제9대 번주, 명군 마쓰다이라 요리히로

에도 시대 약 260년 동안 명군이라 불린 번주는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산유키 다카마쓰 번의 제9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히로(松平頼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쓰다이라 요리히로가 번주로 취임했을 무렵, 다카마쓰 번의 재정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에도 번저(藩邸)의 화재로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11대 쇼군의 딸을 맞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어전(御殿)을 지어야 하는 상황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리히로는 불평 없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는 번의 재원이 마련되지 않는 법입니다.

다카마쓰 지방에는 큰 강이 없어 수원(水源) 확보가 어려웠고, 오랫동안 저수지에 의존해 왔습니다. 고포 다이시(弘法大師, 구카이)가 만든 만노이케(満濃池)가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번주들은 저수지 조성에 재정을 쏟아부었고, 때로는 용수 사용을 제한할 정도였습니다. 마쓰다이라 요리히로는 대대로 쌓여 온 적자를 해소하고자 지역 산업 진흥에 힘쓰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을 일으킬 만큼의 여력과 예산은 번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리히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에 부가가치를 더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산유키 지방의 특산물은 목화, 소금, 설탕, 이른바 '산유키 삼백(讃岐三白)'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리히로는 소금과 설탕에 특히 주목했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등용했습니다.

사실 다카마쓰 번에는 번정의 위기 때마다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제5대 번주 시절에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가 등용되기도 했는데, 겐나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하며 당시 막부의 실권자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를 돕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번주의 미움을 사 결국 추방형(他所仕官禁止)을 받아 다른 다이묘를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추방형은 다이묘가 가신에게 내리는 형벌 중 하나로, 파면을 의미하지만 전임 주군의 허락이 없으면 타 번의 가신이 되는 것조차 금지되는, 일반 파면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이었습니다.

산유키 국의 대표 산업, 소금 산업

다시 제9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히로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번 개혁의 위기 속에서 농민 출신의 재능 있는 인물 구메 미치카타(久米通賢)를 등용했습니다. 요리히로는 구메에게 영내를 채울 방대한 염전(塩田) 조성을 명령합니다.

구메의 건의에 따라 사카이데(坂出)에 대규모 염전을 만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히로는 구메를 선봉에 세워 염전 조성을 밀도 있게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다카마쓰 번의 재정은 예상보다 심각했고, 막부로부터 들어오던 자금마저 끊기게 됩니다. 이에 구메는 사재를 털어 공사를 계속했고, 마침내 분세이 12년(1829년), 사카이데의 히가시오하마와 니시오하마에 입빈식 염전(入浜式塩田)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염전의 완성으로 사카이데의 소금 생산량은 일본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게 되었고, 다카마쓰 번의 재정을 크게 떠받치게 되었습니다. 소금 산업은 전후(戰後) 공업지대로 전환될 때까지 산유키 국, 즉 오늘날 가가와현의 대표 산업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한 산유키의 위인 구메 미치카타였지만, 안타깝게도 말년에는 염전 개발 등으로 인한 빚이 가문을 짓누르며 가난한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