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 무역적자국이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는 국가 재정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수출 급증으로 달성된 국제수지 개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열강들은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느라 경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일본과 미국은 직접적인 전화(戰禍)를 입지 않으면서 유럽 열강에 물자를 공급하는 입장에 섰다.
또한 그때까지 열강들이 치열하게 다투어 오던 중국에서의 패권 경쟁은 오히려 일본의 독점적 지배로 바뀌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세계적인 선박 부족 속에 조선업과 해운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일본은 세계 제3위의 해운국 자리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미쓰이물산을 떠나 전쟁 발발 후 우치다기선을 설립한 우치다 노부야(內田信也)처럼, 이 호기를 타고 해운·조선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이런 사람들은 '성자(成金, 누보리셰)'라고 불렸다.
조선업의 활성화로 강재가 크게 부족해지자 정부는 관영 야하타 제철소를 확장했고, 남만주철도는 안산 제철소를 새롭게 설립하였다. 아울러 그동안 독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약품 등 화학 분야의 국산화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제사(製絲) 산업에서는 호황을 누리던 미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늘었고, 면직물 산업 역시 아시아 시장을 향한 수출을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무역적자국이던 일본은 1915년(다이쇼 4년) 무역흑자로 전환하였고, 개전 당시 약 11억 엔에 달하던 부채는 완전히 청산되어 1920년에는 약 27억 엔의 대외 채권을 보유한 채권국으로 변모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공업 생산액이 처음으로 농업 생산액을 추월하였고, 공업 부문에 종사하는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또한 전쟁 중과 전후에 걸쳐 일본산업클럽, 일본경제연합회 등 경제단체가 잇달아 창설되면서 재계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폭발하는 민중의 불만, 쌀 폭동
전쟁 붐 덕분에 '성자'라고 불리는 신흥 부자들이 배출되었지만, 이것이 곧바로 서민들의 생활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수입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 역시 생필품을 구매해야 하는 만큼 물가 급등은 필연적으로 지출 증가로 돌아왔다. 도시 노동자들 역시 임금은 오르긴 했지만 지출 증가분이 더 컸기 때문에 넉넉하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급등하는 물가 가운데서도 특히 심각했던 문제가 바로 쌀값의 폭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군용미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데다, 도시 인구 증가로 쌀 소비량마저 급증하면서 1917년(다이쇼 6년)부터 쌀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918년(다이쇼 7년)에는 도야마현 우오즈정의 주부들이 현 밖으로 쌀이 반출되는 것을 막겠다며 소요를 일으켰다. 이듬해 이와 유사한 소동이 인근 지역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언론이 이를 전국적으로 보도하면서 쌀을 값싸게 팔라는 운동은 눈덩이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미곡상과 기업을 습격한 혐의로 전국에서 2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7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쌀 폭동'이라 불린 이 소요는 중심 지도자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 규모는 민중운동 사상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 이 소동의 확산에는 신문 언론이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고, 정부는 신문에 대한 검열과 단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결국 당시 데라우치 내각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原敬)가 후임 총리로 취임하면서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하라 다카시는 귀족 작위를 갖지 않은 서민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총리였기에 '평민 재상(平民宰相)'이라 불리며 국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