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지금 사랑하고 계신가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가치관과 연애 방식은 크게 달라집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 사회에서는 가문의 서열이 연애의 중요한 기준이었고, 전국시대에는 다이묘 가문들 사이에 정략결혼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자손으로 집안을 이어가기 위해 권력자들은 일부다처를 허용하며 첩을 두기도 했죠.
이러한 일본의 연애·혼인 풍습 속에서, 아주 먼 옛날 조몬 시대는 어땠을까요?
오늘은 조몬인의 삶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다만 이 글은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유적과 출토 유물을 바탕으로 하되, 상상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조몬인의 연애
조몬 시대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먼 과거라 연애의 모습을 그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몬인은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는 장례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그들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보기는 오히려 이상합니다.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글에서 현대인에게 DNA가 이어져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조몬인의 DNA 역시 오늘날 일본 열도 사람들에게 약 12% 정도 전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일본 열도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온 역사는, 조몬 시대의 남녀가 우리처럼 만나고 후손을 남겼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든 인간 세계든, 다음 생명을 잇는 것은 태어난 존재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하지만 조몬인이 무작위로 남녀가 짝지어져 후손을 남긴 것은 아닙니다. 조몬 시대에도 나름의 규칙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애의 규칙
조몬 시대의 전형적인 마을은 대략 15~20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마을 구성원은 혈족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젊은 처녀가 연애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제나 부모·자식 간의 금기된 사랑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근칩 교배가 가져오는 여러 폐해를 그들 역시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을 안에서의 연애는 금기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몬 시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열도 전역에서 활발하게 교류와 교역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즈 제도 하치조섬의 구라와 유적에서는 간토·도카이·긴키 지방은 물론 아오모리의 토기까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작은 통나무배를 타고 거친 바다를 건너 섬까지 이동했습니다.
조몬인의 명품으로 불리는 흑요석은 나가노현에서 주로 산출되며, 그 주변 지역 유적에서 많이 발굴됩니다. 물건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운반했기 때문에, 지방 마을 사람들이 산지로 찾아갔거나 산지의 사람들이 물건을 나르며 다른 마을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마을 외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것은 적령기의 남녀에게 절호의 만남의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손님을 환대해 오래 머물게 하고, 마을의 처녀와 사랑에 빠져 자녀를 낳았을 것입니다.
조몬인의 첫 출산은 18~19세경?
여러 마을이 모여 기지 마을(중심 마을)이라 불리는 큰 마을에서 제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축제에는 특유의 고양감이 있어 사랑이 싹트기 쉽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축제에서 사람들은 명절의 옷을 차려입고 의례를 치른 뒤, 젊은이들은 숲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정기 축제는 조몬인에게 중요한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을은 외부의 새로운 피를 받아들이며 유지되고 성장해 나갔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현존하는 수렵채집 민족의 사례를 고려할 때 조몬인의 첫 출산은 18~19세경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영양 상태를 고려하면 초경은 14~15세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경우 첫 출산 나이는 충분히 그럴듯한 수치입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근칩이 아닌 배우자를 만나려면 외부 교류가 필요했으므로, 초경 이후 곧바로 임신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생 동안 몇 명의 자녀를 낳았을까요?
이 역시 민족학 사례를 고려하면 4~6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양 상태가 개선된 조몬 시대 중기에는 더 많이 낳았을 수도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이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음을 감안하면, 어떤 사람은 임신과 육아를 반복하며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육아에 지친 어머니가 요절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텐데, 실은 당시 아이들은 동생을 돌보며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아이를 '사회의 아이'로서 함께 돌봐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출산한 어머니가 있다면 젖먹이는 일도 서로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에도 시대의 나가야(장옥) 공동체와 비슷한 셈이죠. 사냥이나 원정으로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는 마을 전체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 했습니다.
남자들이 사냥과 이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던 이 시대는 여성들이 떠받쳤다고 합니다. 삶의 지혜는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딸로 전해졌습니다.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고, 숲의 은혜를 거두고,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기를 빚고 식물 섬유로 옷을 짜는 등, 여성들이 생활의 대부분을 지탱했습니다.
조몬 시대가 현대 육아에 주는 시사점
현대에는 핵가족화가 진행된 가운데, 육아를 개인의 몫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지만 개인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육아는 혹독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집안이 기울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육아에 적극적인 '이쿠멘'(육아 참여형 아빠)도 있지만, 여성의 부담이 무겁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조몬 시대처럼 '아이는 마을의 아이'로서 사회 전체가 함께 키우는 발상을 현대에 성공적으로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시에는 중년 남녀가 노동에 바빴고, 아이들은 연장자들이 돌봐주었다는 견해를 가진 연구자도 있습니다.
실제로 195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에서는 그러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농촌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도시 지역에서도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수평적 연결이 일부 존재하며,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