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전국시대 3대 무능 다이묘, 호소카와 마사모토·오우치 요시타카·이마가와 우지자네

 

영웅과 어리석은 자가 공존한 전국시대

응인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약 150년간 이어진 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전국 다이묘가 난립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으로 위업을 쌓았고, 그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영웅이 있는 만큼, 그림자처럼 '어리석음'으로 평가받는 인물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3대 무능 다이묘'로 불리는 세 인물을 소개합니다.

손에 넣은 권력을 스스로 흩어버린 호소카와 마사모토

호소카와 마사모토, 오우치 요시타카, 이마가와 우지자네. 이 세 사람은 활동한 시대가 서로 다르지만, 실제로 재능이 있던 부분도 있었음에도 그림자가 너무 커서 후세에 '전국시대 3대 무능(愚將)'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전국시대 초반에 활약한 인물로,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직을 세습하던 호소카와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응인의 난의 발단이 된 인물로 꼽히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대립했으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옹립해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쇼군보다 더 큰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반쿠보(半公方)'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외교와 내정에 능했던 마사모토였지만, 결정적으로 수험도(修験道)에 심취하면서 정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수험도는 극한의 고행을 통해 범인(凡人)의 지혜를 넘어선 힘을 추구하는 혹독한 수행으로, 쉽게 말해 현자(仙者)가 되는 수행에 빠져든 것입니다.

게다가 마사모토는 평생 아내를 맞이하지 않아 친자식이 없었고, 양자만 세 명 두었습니다. 그런데 후계자를 확실히 지정하지 않으면서, 세 양자는 호소카와 경가(京兆家)의 가독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독 다툼은 양아버지 마사모토가 암살당할 때까지 이어졌고, 그 소란은 결국 전국 다이묘의 등장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권력 다툼에 몸을 담았던 마사모토 본인은 주변을 정비해 손에 넣은 권력을 끝내 정리하지 못했고, 그 갈등이 전국 규모의 혼란으로 번졌다는 점에서 후세에 어리석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취미에 빠져 프로급 실력을 보여준 오우치 요시타카와 이마가와 우지자네

 

서쪽의 교토를 만들었지만 무략은 평범했던 오우치 요시타카

오우치 요시타카는 모리 모토나리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나가토·스오·아키·이와미·치쿠젠·부젠 등 6개 국을 지배한 다이묘였습니다. 당시 모토나리는 요시타카 휘하의 일개 국인(國人)에 불과했습니다.

하극상의 기풍이 만연하던 시절, 오우치 영지에서 나가토와 스오는 안정적이었지만 나머지 4개 국은 슈고다이(守護代) 출신 중신들의 잠재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요시타카는 가신들이 독립적인 다이묘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지를 분할 관리하고 슈고다이들을 교토 부근에 머물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세력들이 하나둘 전국 다이묘로 도약하면서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오우치 가문은 해외 무역 독점 덕분에 방대한 영토와 막대한 부를 축적해 서일본에서 손꼽히는 재정 기반을 자랑했습니다. 그럼에도 중신 스에 하루카타에게 공격당해 요시타카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다이네이지 변).

요시타카는 내정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군략 같은 무사의 본령에 있어서는 평범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응인의 난으로 황폐해진 교토를 떠난 문화인들을 후하게 보호해, 전란으로 소실될 뻔한 문화와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실제로 요시타카가 다스린 야마구치에서는 기타야마 문화와 히가시야마 문화가 융합된 '오우치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가 탄생해, '서쪽의 교토'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이처럼 오우치 요시타카는 내정 면에서 남다른 재능을 지녔지만, 에도 시대 성립 이후 문필보다 간결하고 강건함을 숭상하는 무인 기풍이 지배하면서, 문화를 앞세운 요시타카는 '우아함에 빠져 몰락한 어리석은 장수'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주색과 케마리에 빠져 가문을 7년 만에 잃은 이마가와 우지자네

같은 이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 역시 어리석은 장수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세이와 겐지의 유력 일족으로, 아시카라 가문 다음가는 격을 지녔다고 알려진 명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요시모토 대에는 스루가·도토미·미카와 3개 국을 거느린 다이묘였으나, 우지자네는 아버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에서 패사한 뒤에야 가문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지자네는 주색(酒色)에 빠져 실권을 중신들에게 넘겼고, 여기에 반발하는 가신들마저 제대로 규합하지 못하면서 영토를 도쿠가와·다케다·호조에게 잠식당해 단 7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마가와 가문은 나라를 잃었지만,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에도 고위 가문으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우지자네 본인도 1615년까지 장수했습니다.

영지 운영에서는 미숙했던 우지자네였지만, 연가(連歌)·와카(和歌), 특히 케마리(蹴鞠)에서는 달인급 솜씨를 자랑했습니다. 슨푸 성에서는 케마리 대회가 자주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시즈오카현의 뜨거운 축구 열풍이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오우치 요시타카를 제치고,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무능함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승리해 상경하여 천하를 호령했다 해도, 우지자네 대에 이마가와 가문이 다른 세력에게 멸망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여색을 좋아한다", 하지만 과하면 골칫거리

자손의 번영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전국 무장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 시대 여색에 대한 욕망의 양대 산맥은 단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토모 소린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에게 "아내가 운다니, 여자들이랑 놀아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색을 밝혔습니다. 천하를 손에 넣은 뒤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는 가신의 아내와 자녀를 인질로 삼아 곁에 두었는데, 미녀 아내를 둔 가신들은 출진으로 집을 비울 동안 아내를 탐할까 두려워했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여성 취향 또한 뚜렷해서, 아름답고 고귀한 혈통을 특히 선호했다고 합니다.

여색에 있어서 오토모 소린도 히데요시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소린은 성 밖으로 나돌며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다녔고, 눈에 들어온 여인에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구애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무쌍이 아니라 '색중(色中)의 왕'이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입니다.

쇼군 알현차 교토에 갔을 때도 행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안과 달리 교토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미치지 않기에, 거리에서 마주친 여인을 납치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는 이러한 색욕의 나날이 뚝 끊긴 것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와 소린 모두 화려한 색욕의 나날을 보냈지만, 소린은 3남 6녀를 두어 모두 성인으로 자랐고, 히데요시에게는 히데요리 한 명만 성인까지 자랐습니다.